조선의 스테디 출판 -『삼강행실도』 다시 보기

2015. 8. 31.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출처_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忠)· 효(孝)· 열(烈)이란 단어는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단어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저 나이든 어르신들이 강조하는 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는 효를 다하며, 부인은 남편을 위해 수절을 지킨다는 의미는 아마도 디지털 세대에게 보다는 아날로그 세대에게 어느 정도 깊게 내면화되어 있는 가치관일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어, 개인화된 사회에서는 이러한 가치가, ‘돈’의 가치에 밀려, 그다지 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날로그 세대의 의식 너머 저편에는 아직도 이러한 개념들이 잔여적 가치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정치권력의 홍보, PR


역사적 과정에서 볼 때, 특정 정치권력은 그들의 권력체계와 권력자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미지와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잡든, 혹은 국민투표에 의해 권력을 잡든지 간에, 새로운 체제는 구체제의 저항을 흡수하고, 정치권력의 정당성과 안정성 확보를 위해 공중과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해 나갑니다. 이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홍보내지는 PR입니다. 


고려 체제를 무너트리고 이씨 왕조를 건설한 조선 초기 위정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사회질서의 이념적 틀을 만들고,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정치이념을 정립하여, 그 메시지를 관료와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홍보를 의미합니다. 당시 홍보와 PR을 위한 가장 유용한 매체는 단연코 책이었습니다.


유교의 정치이념과 가치관, 윤리관을 확산하려는 조선왕조의 시도는 여러 가지 방향에서 나타났습니다. 엄격한 신분제와 가부장제에 관한 법률 등을 마련하는가 하면, 『주자가례』, 『소학』 등과 같은 책을 통하여 정치이념을 홍보하고, 왕조, 관료, 백성과의 상호 공중관계를 형성· 유지하려 노력하였습니다. 


부실한 정치이념의 홍보


그러나 조선 초기에 정치이념의 홍보는 위정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종 시대까지만 해도 사회질서가 안정화 되지 않아서, 각종 패륜적 범죄가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세종 10년 1428년 9월 27일 전주에 사는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왕실에 보고되었습니다. 이를 보고받은 세종은 “계집이 남편을 죽이고, 종이 주인을 죽이는 것은 혹 있는 일이지만, 이제 아비를 죽이는 자가 있으니, 이는 반드시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라 말하며, 이러한 사회적 사건들이 빈발할 경우 왕조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신하들과 함께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


출처_서울신문

새로운 방안 - 『삼강행실도』


그 결과 세종은 법에 의한 처벌강화라는 방법보다도 조선의 정치이념인 유교사상을 홍보하여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더 시급하고 우선이라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에 세종은 1431년 부제학 설순에게 『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지시했습니다.


『삼강행실도』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효자·열녀 110명씩 모두 330명을 뽑아 모범이 될 만한 행적을 글과 그림으로 엮어 칭송한 책입니다(이재정, 2008). 이것은 1432년 6월 편찬이 끝나고 교정 작업을 거쳐, 1434년 주자소에서 인쇄를 마친 후, 전국에 배포되었습니다.


『삼강행실도』는 세종을 비롯한 주변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편찬자들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다분히 정치적 의도성을 가지고 메시지를 작성하였습니다. 이들은 가족의 지배질서를 확고히 하여 가족을 안정시키는 것이 왕조의 근간이고, 가족 내의 효를 군신 간의 충으로 확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즉 가족의 효를 군신 간의 충으로 동일시하는 효과를 염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념을 홍보한 매체가 바로 『삼강행실도』였습니다. 이는 세종 때 처음 발간되어, 성종, 중종, 선조, 정조 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또한 책의 제목도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로 변화해 나갔습니다.


조선 시대 가장 많이 발행된 책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삼강행실도』가 대대적으로 보급된 것은 중종 때였습니다. 중종은 1511년 10월 20일 『삼강행실도』 2,940질을 찍어 반포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간행부수가 밝혀진 조선 시대 책 가운데 가장 많은 부수입니다. 조선왕조가 『삼강행실도』보급에 얼마나 열중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강명관, 2014)


독자의 편의성을 고려한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류의 간행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서 살펴보면, 그 속에는 수용자의 편의성을 고려한 점이 면면히 나타납니다. 당시 백성들은 문맹률이 높고, 특히 한문에는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편집자들은 이 점을 고려하여 메시지를 한글로 작성하였습니다. 성종 시기에는 『삼강행실도』가 한글로 번역되어 간행되었으며, 『속삼강행실도』 이후에는 한글본 만 간행되기도 하는 등 수용자의 입장을 고려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있었습니다.


오륜행실도 / 출처_한국학자료센터



메시지 효과를 높이기 위한 편집의 변천과정


『삼강행실도』의 편집과정 변천을 살펴보면, 먼저 메시지의 선택기준이 시대마다 다릅니다. 조선조 초기에는 열녀의 기준이 죽은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었으나, 후대에 와서는 이러한 내용이 누락되고, 살아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더 권장되었고, 열녀도의 사례로 삽입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 때에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들이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삼강행실도』는 편찬 당시 왕조의 상황을 반영한 결과일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대 국민관계를 원활히 하려는 의도에서 편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강행실도』류가 재편집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난 또 다른 특성 중 하나는 메시지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메시지 가치 중, 근접성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예로 후기 재편집 과정에서는 중국의 사례보다는 조선 국내에서 발생한 사례들을 많이 삽입하고 있습니다. 거리적 측면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메시지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독자가 보다 심리적인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삼강행실도』류는 메시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 사례의 앞뒤에 그림과 시를 덧붙인 점이 특징입니다.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우선 그림을 통해서 흥미를 갖게 만들고, 글을 읽게 만드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풀이 됩니다. 그림을 삽입함으로써 이 책의 제목도 ‘록(錄)’이 아니라 ‘도(圖)’가 된 것입니다. 


『삼강행실도』의 효과


『삼강행실도』가 어떠한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과학적으로 알 길이 없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에 수록된 기록에 의하면, 일반 백성들이 책의 내용을 따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인지효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행동유발 효과도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잘라 이를 태워서 약에 타 마시게 하여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 남편이 죽자 10년간 삼년상처럼 지내며 수절을 지킨 이야기, 죽은 아버지의 묘 옆에서 여묘살이를 한 이야기 등등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사례들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비과학적이고 미신적 요소가 있고, 그 사실의 진위여부를 알 길이 없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조정에서 거론 되는 것 자체가 그만큼  『삼강행실도』의 효과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왕조는 『삼강행실도』에 나타나는 모범적인 사례를 따라하는 백성에게는 포상을 주거나 열녀문을 설치하여 충효열의 가치관을 백성들에게 깊게 각인시켰습니다. 그래서 후대에까지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그림은 <이씨단지(李氏斷肢)>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왜구가 욕보이려 하자 이씨는 심하게 저항했고, 그 바람에 왜구에게 사지가 잘려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초점은 왜구의 잔학성이나 전쟁의 비인간성이 아니다. 오로지 열녀가 되는 길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길임을 강변한다. / 출처_경향신문


근현대에 까지 영향을 미친 『삼강행실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강행실도』는 조선시대를 통해 왕권이 처해 있는 상황적 맥락에 따라 새롭게 편찬되면서 지속적으로 발행되었습니다. 1859년 철종 10년 목판본으로 『오륜행실도』가 발행되었으며, 언더우드가 『오륜행실집요』라는 제목으로 납활자본 인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아가 일제시대에는, 『삼강행실도』의 단지(斷指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는 일)나 할고(割股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일)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신문에 기사화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일제 시대를 경험한 고조나 증조부로부터 교육 받은 우리네 할아버지들은 그러니 전통적인 충효열 개념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 다면, 『삼강행실도』의 영향력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근현대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충효열


현대에서 충(忠)이란 것은 특정 정치권력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받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효(孝) 역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느 경제학자의 말에 의하면, 고령화 시대는 남성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여성중심의 사회가 된다고 합니다. 열녀가 아니라 열남(?)이 탄생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선 시대 가장 지속적으로 발행된 스테디 출판물이고, 현대적 가치관과는 다소 이질적인 충효열을 강조한 『삼강행실도』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이념을 전파, 백성들로 하여금 체제유지에 기능적으로 작동하도록 한 홍보용 도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요즘의 책 기능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참고문헌

강명관(2014).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서울:천년의 상상

이재정 (2008). 『조선출판주식회사』. 파주: 안티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