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다면, 두드리시오! ”- 신문고

2015. 9. 2.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북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악기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북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침으로써 집단이나 조직의 행동을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북은 박자를 통해 집단행동을 일체화해 줌으로써 구성원의 심리적 안정감과 공감대를 형성해 주기도 합니다. 또한 북은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주요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북 소리가 하나의 상징이 되어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신문고는 “나 억울합니다. 왕이여, 내 말 좀 들어보소!”라는 신호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문고는 백성과 왕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상호 연결기능을 하였습니다. 


신문고의 유래


조선시대 신문고는 맨 처음 ‘등문고’라 칭하였고, 한때 ‘승문고’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주로 ‘신문고’라 불렀습니다. 이 제도는 중국 후한 영제 때(168-189년) 도입되고, 진나라(265-316년) 때 ‘등문고’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조선은 중국 송나라의 등문고 제도를 본받아 1401년 태종 1년 7월 1일에 ‘등문고’라는 이름으로 설치하였고, 그해 8월에 ‘신문고’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태종 때 설치된 신문고는 조선의 역사를 통해 폐지되기도 하고, 다시 설치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한 조선 신문고의 역사는 아래에 나타나 있습니다.


조선 신문고의 역사


참고자료

김영주, 「신문고 제도에 대한 몇 가지 쟁점」, 『한국언론정보학보』 2007년 가을, 통권 39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왕조실록』을 참조하여 작성


신문고 설치령


태종은 신문고를 설치하고, 교서(왕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문서)를 내렸는데, 그 주된 내용은 ⓵ 정치상황과 백성의 상황을 아뢰고자 하는 자 ⓶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하는 사람 ⓷ 반역을 도모하는 자를 신고하고자 하는 자는 혼자 혹은 집단으로 와서 북을 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서의 내용은 한마디로 청원(請願)·상소(上訴)· 고발(告發)이었습니다. 교서의 내용은 조선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으나, 세조 때 와서는 청원과 고발에 관한 내용은 빠지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만 자세히 보완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문고는 자연스럽게 사적인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로 정착되었습니다. 


신문고의 운영


신문고는 의금부의 당직청이라는 곳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관장하는 사람은 순찰부대의 책임자 격인 영사(令士) 1명과 관리인 격인 나장(螺匠) 1명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을 치고 싶다고 일반인들이 마음대로 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즉 격고를 위한 절차가 복잡하였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일 경우, 담당관원에 민원을 호소하여 해결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확인서를 받아서 제출합니다. 지방 사람의 경우, 먼저 수령에게 호소하고 다음으로 관찰사에게 호소한 다음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서울의 사헌부에 호소합니다. 이 때 해결되지 않으면, 확인서를 받아 제출합니다. 확인서를 받은 담당관리는 이를 문서화하고, 주소를 확인한 다음 책임자인 영사가 의금부에 보고하고, 의금부의 확인이 떨어지면, 비로소 북을 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을 치면, 의금부 직원은 왕에게 그 내용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면 대개 해당관청은 5일 이내에 이를 처리하였습니다.

  


신문고를 친 격고 사례


『태종실록』에 나와 있는 신문고를 친 격고 사례는 41건이었습니다. 개인이 북을 친 경우는 83%(34회)였고, 집단이 친 경우는 17%(7회)였습니다. 이 중 개인적인 상소사건이 67%(28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는 사회적 차원의 청원사건 30%(12건), 국가적 차원의 고발 사건 3%(1건)순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노비문제로 격고한 것이 37%(15건)로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는 청원으로 북을 친 것이 30%, 12건이었습니다. 처벌이나 옥살이에 관계된 것은 9건으로 22%였습니다. 나머지는 재산문제(2건 4%)나 기타 문제(2건 4%)였고, 고발은 무고로 여겨진 1건(3%)이 있었습니다(오세홍, 1993). 또한 북을 친 사람의 신분별 구성을 보면, 약 90%(37건)가 양반이었으며, 나머지는 중인이 7%로 3건, 천민이 3%로 1건이었습니다. 이를 지역별로 보면, 90%(37건)가 서울에 사는 사람이 북을 쳤으며, 나머지 7%만이 지방민이었습니다. 한편 세종대에는 격고한 사람의 신분은 양반 57%, 중인 12%, 상민 8%, 천민 8%, 신분을 알 수 없는 기타가 15%였습니다. 지역별로 보면, 재경이 84%, 지방이 8%였습니다. (김남돌, 2005)


 태종과 세종대 격고인 신분과 거주지

                                                                 ( )은 건수


 시대

 격고인의 신분

 격고인의 거주지

 양반

중인 

상민 

천민 

 기타

재경 

지방 

기타 

 태종

 90%(37)

  7%(3)

 

  3%(1)

 

  90%(37)

  7%(4)

 

 세종

 57%(15)

  12%(3)

  8%(2)

  8%(2)

  15%(4)

  84%(22)

  8%(2)

 8%(2)

 태종과 세종대 격고인 신분과 거주지

 * 오세홍(1993)과 김남돌(2005)의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


지방의 유사 신문고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취임 첫날 “선비와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서 병폐에 대한 것을 묻고 여론을 조사하도록 한다.”(『목민심서』, 부임육조, 이사)하여 민심과 여론을 중요시 하였습니다. 아울러 그는 “취임 첫날 몇 가지 일을 발령해서 백성들과 약속하되 바깥 문설주(문을 세우기 위한 기둥) 위에 특히 북 하나를 걸어 놓도록”지시 하였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북을 걸어 놓으라고 한 것은, 백성의 억울한 사정 등이 소장으로 접수되지 않고, 말단 직원(이서)들의 농간으로 백성의 민의가 전달되지 않을 때, 언제든지 북을 치고 백성의 의견을 접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약용은 “민원서류의 제출이라든지 그 처리에 대하여 공고를 붙여서 백성들에게 자세히 알리고 약속함으로써 아전이나 군교들이 농간하는 폐단을 막고 공정한 처리를 하도록 한다. 특히 소송관계에 있어서 더욱 철저히 하도록 한다. 그러나 아전들이나 관하인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민원서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염려가 있으므로 청사의 대문 문설주 위에 북을 매달아 놓고 새벽이나 날이 저문 후에 북을 울려서 수령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내용으로 보아, 지방 수령들도 백성들의 억울함을 들어 주기 위해 서울의 신문고와 같은 기능을 하는 작은 북을 문설주 위에 매달아 놓고 호소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고의 문제점


덕치와 민본이 합해져 백성을 위한 정치적 배려로 보이는 신문고 제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문고는 그 설치가 한양의 대궐 근처에 있어, 지방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이용하기 불편하였으며, 절차가 까다로워 자유로운 사용이 불가능했고, 개인적인 이해나 노비, 형벌, 재산 문제 등에 관한 사안으로 제한되어 있어, 신문고를 이용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나 세종 때에는 수령 등 상관의 고소를 금지하는‘부민고소금지법’이 시행되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범위가 매우 좁았습니다. 또한 격고를 하였다 하더라도, 왕에게 보고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 그 실효성이 의문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억울하면, 북을 처라!”라는 신문고는 하층민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라기보다는 왕의 권위와 신성함을 드러내고, 양반 지배층의 언로를 열어 지배체제를 안정화시키려는 수단(최호,2005)이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여론수렴의 상징적 표현’(한상권,1993)이라고도 비판합니다.  


출처_국민신문고 홈페이지


인터넷 신문고


오늘날 조선 시대 신문고는 인터넷과 모바일 속에서 부활하였습니다. ‘국민 신문고’(http://www.epeople.go.kr/)사이트가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국민 신문고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고 있답니다.


-법령·제도·절차 등 행정업무에 관한 질의 또는 상담형식을 통한 설명이나 해석의 요구

-정부시책이나 행정제도 및 운영의 개선에 관한 건의

-행정기관의 위법부당하거나 소극적인 처분 및 불합리한 행정제도로 인하여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국민에게 불편 또는 부담을 주는 사항의 해결 요구

-그 밖의 행정 기관에 대하여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사항


그런데 익명·가명·허위주소 등 민원인 정보가 불분명한 자가 행정기관에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경우는 허락하지 않는 답니다. 그리고 행정기관이나 공공단체 또는 소속직원이 공무와 관련하여 행정기관에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경우도 불허한답니다.


“억울하다면, 클릭하세요!”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www.epeople.go.kr/

김남돌(2005). 「조선 초기 신문고 운영과 영향」, 안동대학교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김영주(2007). 「신문고 제도에 대한 몇 가지 쟁점」, 『한국언론정보학보』 2007년 가을, 통권 39호

오세홍(2002). 「조선 초기 신문고의 설치와 운영」, 한국교원대학교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최호(2005). 「신문고는 누구나 두드릴 수 있었을까?」, 『밤나무골 이야기』, 율곡연구원

한상권(1993). 「조선시대 소원제도의 발달과정」, 『한국학보』 19권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