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0. 09: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5년 11월호>에 실린 독립사진작가 전해리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시리아 난민 친구와의 만남
2014년 초에 케어(Care)라는 구호단체와 일을 하기 위해 요르단과 레바논을 간 것이 시리아 난민들을 만난 첫 경험이었습니다. 이때 만난 오므란이라는 친구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하게 만든 당사자입니다. 늘 생글생글 사람 좋게 웃는 오므란의 모습에서 그가 요르단으로 건너오기 전 겪어야 했던 아픔을 느끼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2012년 말에 친누나가 출산이 가까워져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총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즉사하고 절규하던 누나도 배 속의 아이를 충격으로 잃었으며 매형이 체포되어 끌려가는 것을 하룻밤 사이에 목격한 그는 희망을 잃고 형, 남동생과 함께 2013년 초에 요르단으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필자인 전해리 사진작가는 시리아 난민들의 유럽으로의 탈출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터키에서부터 직접 난민선을 타고 생사가 걸린 험난한 여정을 난민들과 함께 했다. PD수첩 방송화면 캡처.
오므란의 초대로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그의 형제와 다른 난민 친구들과 며칠을 같이 보내게 됐는데 이때 그의 형 파디는 첫 만남에서 뜻하지 않은 부탁을 했습니다. 약혼녀가 가족과 함께 얼마 전에 독일로 망명을 갔는데 내가 약혼반지를 대신 전달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처음 만난 나를 그리 쉽게 믿느냐고 되물었지만 파디는 심각했고 저는 기꺼이 메신저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독일에서 만난 파디의 약혼녀와 가족들은 자그마한 도시에서 보스니아 난민과 아파트를 함께 쓰고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억지로 다른 나라의 난민들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유럽으로 오는 여정 그 이상으로 정착을 하고 나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난민들이 유럽으로 오기 위해 겪는 과정을 시작 단계에서부터 카메라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난민이 되기로 결심하다
이때 즈음에 카이로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무하마드는 이러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게 도와줄 적합한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시리아 정부군 대위 출신인 무하마드는 고향다라에서 일어난 반정부 활동을 탄압하라는 명령에 불복해 탈영한 뒤 난민이 된 사람으로 난민들과 시리아인 브로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만약 내가 원한다면 자신이 브로커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저를 자신의 여정에 합류시켜줄 수 있을 거라고 먼저 제안을 해왔습니다. 저널리스트임을 숨겨야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수많은 시리아 난민들이 터키 해안에서 난민선을 타고 유럽으로 향한다. 이들은 구명조끼 한 벌, 조각배 한 조각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뒤 간신히 육지에 도착해 안도의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직후 여러 사람과 상의를 하며 위험 요소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안전장치를 찾는 동시에 언론사와 방송국에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비슷했습니다. 너무 위험하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을 수 있기에 어느 기관도 선뜻 나서기 힘들 것이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결국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저는 일단 배를 타고 상황에 따라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한 뒤 무하마드에게 제 자리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올 여름 초에 이집트로 돌아갔을 때 그는 부인의 반대로 생각을 바꿔 이집트에 남기로 했다고 알려왔습니다. 맥이 빠지는 소식이었지만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에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여정을 따라나설 수 있는 난민을 찾아 제 일의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는 첫 단계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더불어 이것이 실현 가능한 작업인지 조금씩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올해의 이집트는 상황이 더욱 어려워져 대다수의 난민들이 배에 타기도 전에 이집트 군경찰에 체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드디어 난민선에 올라타다
결국 이집트 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섭이 덜한 터키를 기점으로 그리스를 거쳐서 유럽에 도달하는 시리아 난민의 수가 올해부터 급격히 늘어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는 처음으로 터키로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이미 여름도 막바지라 시간적으로 올해 안에 배를 탈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난민을 소개 받아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만난 많은 난민들이 이야기하듯 인샬라,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젤을 만난 것은 이번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의 연락처를 받은 것은 이스탄불로 가기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이전부터 알고 지낸던 오므란과 달리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므란이 떠난 이후에 딱히 옵션이 없던 저로서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과장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는 그로부터 신뢰를 느낄 수 있었고 저 또한 그동안의 내 경험과 취재 취지를 들려주었습니다. 바젤의 입장에서는 저 같은 저널리스트를 도와주는 것이 본인의 여정을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컸고 저를 도와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브로커를 통해 자리를 마련해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다음날 브로커를 만나 은밀하게 돈을 위탁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여정에 본격적으로 동참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금은 두근거렸습니다.
(이미지 출처 - MBC, 'PD수첩')
해안가 수풀 속에 숨어 장시간 대기를 하고 있을 때 같은 장소에 도착한 아프가니스탄난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시리아 난민들뿐 아닌 수많은 나라에서 온 다른 난민들의 실상도 실감하게 됐습니다. 시리아 내전이 많은 난민들을 발생시키고 유럽으로 가는 행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또는 파키스탄에서 온 난민들도 시리아인들만큼이나 큰 위험에 처했던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들이 시리아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난민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 사정을 알지 못한 채 너무 단순하게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MBC, 'PD수첩')
며칠 후 세르비아에 도착했을 때 기차역에서 난민들을 돕던 한 알바니아 자원봉사자가 했던 얘기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코소보 지역의 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을 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해 시리아 이외에도 각지에서 난민들은 꾸준히 발생해왔고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이거나(현재 시리아 난민 사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국가들의 정책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이 여정을 통해 깨닫게 됐습니다.
인간의 선과 악을 동시에
브로커의 역할은 이 해안까지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타고 갈 배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바다에서의 불안했던 항해를 마치고 유럽의 첫 관문인 레스보스섬에 도착했을 당시의 벅찬 감정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 짓게 만들 것입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거나 환하게 웃는 그리고 곳곳에서 기도하거나,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어머니의 일상적인 모습이 한데 어우러진 광경은 난민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밝은 주황색의 수많은 구명조끼들이 해안가를 따라 버려진 것을 바라보며 저는 이 감격적인 광경이 올 한 해 여름 동안 얼마나 자주 반복됐으며, 또한 운이 좋지 않아 이 바다에 목숨을 바쳤을 적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날 밤을 보낼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도착한 마을에는 이미 수많은 난민들의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같은 배에 탔던 이들과 소셜 네트워크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여기저기서 피우기 시작한 장작불에 젖은 옷을 말리며 하나둘씩 맨바닥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기간 난민 생활을 한 이들도 이렇게 맨바닥에 자는 경험은 하지 못한 듯 아니면 조금이라도 빨리 전진을 해야 하는 마음이었는지 많은 이들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가방을 챙겨 길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밤에는 워낙 기쁨에 겨워 심각히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레스보스의 수도인 미틸리니를 향해 60km에 가까운 거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걷기 시작할 때는 솔직히 ‘중간에 버스나 차를 얻어 탈 수 있겠지’라는 조금은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10여 km를 걸어 도착한 다음 마을에서 우리는 지방정부가 난민에게 차량 제공을 금지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전날 밤의 환희와는 달리 이것이 유럽에 도착하고 나서도 난민으로서 겪어야 하는 서러움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습니다. 특히나 5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는 부모나 백발의 노인들이 지팡이를 짚으며 걸음을 떼는 모습을 볼 때는 눈물이 핑 돌기도 했는데 이는 반복해서 보게 되는 광경이기도 했습니다.
길 위에서 보낸 2주일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인간의 추악한 면과 따뜻한 모습을 동시에 재발견하게 됐습니다. 뜻하지 않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곳곳에는 어두운 손길을 뻗어 취약한 난민들을 대상으로 쉬운 돈을 벌려고 하는 지역민들이 많았습니다. 난민들이 어디에 가서도 신고를 하거나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역이용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열려 있던 헝가리 국경을 넘어선 이후에 난민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국경 2km 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헝가리 캠프에 가서 난민 등록을 하거나 옥수수밭으로 몰래 빠져나와 근방에 있던 주유소에서 난민들을 불법적으로 수도 부다페스트까지 데려다주는 수많은 운전수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난민들에게 굉장히 적대적인 헝가리에 머무를 이유가 없던 많은 난민들이 주유소로 향했고 운전수들은 한 사람당 200유로를 받고 작은 차에 5~6명씩 태워서 한 시간 반가량 떨어진 부다페스트로 난민들을 나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유의 착취는 곳곳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럽 전역 또는 심지어 호주나 미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옷과 음식물을 자신들의 차에 싣고 와서 난민들이 지나가는 국경선 근처 길목 곳곳에서 돕고 있었습니다. 길 위의 난민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 이들로부터 따뜻한 기운을 받아 피곤함을 잊고 조금씩 전진하는 난민들을 보면서, 낯선 이들을 향한 따뜻하고 사려 깊은 시선과 배려가 이 세상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난민들에게 축복 있기를
(이미지 출처 - MBC, 'PD수첩')
이번 주에 헤이그에서 열린 ECRE(난민과 망명자에 대한 유럽 의회)의 콘퍼런스에 다녀왔습니다. 유럽연합이 난민들에게 좀 더 우호적인 정책을 펼 수 있도록 여러모로 노력하는 의회인데 콘퍼런스에 참석한 유럽 전역의 직원들과 인권운동가, 그리고 유엔난민기구에서 온 이들의 고민은 난민들이 내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규모로 유럽으로 넘어올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부담을 거의 도맡고 있는 독일이나 스웨덴이 겨울 기간 동안 다른 정책을 가지고 나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는 시리아 국경 인근의 터키에 있는 난민 캠프와 난민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들, 그리고 겨울 동안에 불가리아를 통한 육로로 유입되는 난민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그들의 고충을 듣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비가 오면 먼저 드는 생각은 지금도 그리스의 섬들에서 또는 발칸 반도의 어느 곳에서 추위에 떨며 젖은 채로 걷고 있거나 대기하고 있는 난민들 특히 어린 아이들을 감싸 안으며 “하비비(나의 사랑하는 사람)”하며 귀에 속삭이고 키스를 하는 부모들의 모습입니다. 아무쪼록 그들이 새로운 곳에서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기를.
'다독다독, 다시보기 > 이슈연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봇 저널리즘 국내 실험 사례 (0) | 2015.12.07 |
---|---|
‘끊김 없는 뉴스’와 ‘골라주는 뉴스’ (0) | 2015.11.30 |
모바일용 스토리텔링의 시작 (0) | 2015.11.23 |
드라마 '송곳'을 통해 본 우리의 노동현실 (3) | 2015.11.20 |
페이스북 프로필을 물들인 프랑스 국기,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할수 있을까? (0) | 2015.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