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0. 11: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생활백과
[요약] 1899년 뉴욕에서 신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뉴스보이’들의 파업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뉴스보이’라고 들어보셨나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뉴욕에서 신문을 팔고, 배달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소년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이 소년들의 ‘어떠한’ 이야기가 최근 다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1899 뉴스보이 파업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1899년 뉴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문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매체였던 당시, 신문사 간의 경쟁이 매우 치열했습니다. 신문사 간 경쟁이 과열되면서 선정적인 신문 보도를 일컫는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 창시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s)’의 주인공 조지프 퓰리처가 발행하는 ‘뉴욕 월드’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발행하는 ‘뉴욕 저널’이 대표적인 황색언론이었습니다. 이 두 신문사 사이의 경쟁은 실제 싸움으로까지 이어지곤 했습니다. 폭력배를 고용하여 다른 신문을 불태우고, 배달 차량을 망가뜨리고, 판매자를 폭행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뉴스보이’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 두 신문사의 신문을 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뉴스보이’ 대부분이 고아나 가출 청소년이어서 신문팔이가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100장의 신문을 팔고 남는 돈은 고작 35센트 정도였습니다. 이마저도 다음 날 팔 신문을 사기 위해 아껴두어야 했기에, ‘뉴스보이’들은 늘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1899년 ‘뉴스보이’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바로 소비자들 사이에서 1인기를 끌던 ‘뉴욕 월드’와 ‘뉴욕 저널’이 신문의 소비자 가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소년들에게 판매하는 신문값을 올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분노한 ‘뉴스보이’들은 2‘키드 블링크(Kid Blink)’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을 중심으로 모여 두 신문의 판매를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뉴욕 월드’와 ‘뉴욕 저널’ 신문을 다 찢어 다른 이들이 신문을 판매하는 것을 막았고, 5천여 명의 ‘뉴스보이’가 브루클린 다리를 장악하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진 시위는 교통을 마비시켰고, 신문이 외각 지역으로 배달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뉴스보이’의 파업은 2주 동안 계속됐고, ‘뉴욕 월드’의 판매부수는 36만부에서 12만부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뉴욕 월드’와 ‘뉴욕 저널’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신문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배를 고용했습니다. 경찰도 단속과 체포에 나섰으나 ‘뉴스보이’를 해산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시민들 대부분이 소년들의 취지에 공감하여 그들에게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뉴욕 월드’의 퓰리처와 ‘뉴욕 저널’의 허스트는 백기를 들었습니다. 신문 판매 가격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팔리지 않은 신문을 다시 사는데 합의했습니다. 이로써 뉴스보이들은 다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파업은 막을 내렸습니다. 파업에서 승리한 후 다른 곳에서도 ‘뉴스보이’들의 파업이 일어났고, 그들의 열악한 환경이 변화하는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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