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27. 15: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현장소식
양정환, 2016 다독다독 기자단
[요약] 우리민족의 역사 속에는 언제나 묵묵히 제 역할을 해주었던 신문이 있었습니다. 보훈의 달, 날이 따뜻했던 주말, 독립의 과정에서 민족의 대변자이자 소통의 창구가 되었던 신문에 대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고자 광화문역에 위치한 신문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학교 앞에 걸린 보훈의 달 플래카드
5월, 가족의 달을 지나 여름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6월이 벌써 달의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매년 6월을 맞이할 때면 삶 속에서 잊고 지냈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희생에 대해 다시금 되새기고는 합니다.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그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도 우리는 이 땅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는 그들의 희생만큼이나 언제나 묵묵히 제 역할을 해주었던 신문이 있었습니다. 진실을 알리고 국민들의 한을 글로나마 표현했으며, 때로는 배우지 못한 이들을 가르치고자 힘썼던 신문. 하지만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그 역할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조금씩은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대별 신문 이야기
보훈의 달, 날이 따뜻하던 주말, 독립의 과정에서 민족의 대변자이자 소통의 창구가 되었던 신문에 대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고자 광화문역에 위치한 신문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니 1883년 한성순보를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모든 역사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 되어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마주한 새로운 사실들을 다독다독을 사랑하는 모든 분께 전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지만 이번만큼은 주제에 알맞게 일제 강점기 우리 신문의 이야기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합니다.
#국민을 계몽하라, 신문의 등장
▲한성순보와 신문들, 독립신문
여러분은 우리나라 첫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알고 계시나요?
19세기 말, 조선은 주변 국가들에 비해 문화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상당히 뒤처져있었습니다.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선도국가로 자리 잡은 우리지만 그때의 모습은 그저 발전하지 못한 나라, 뒤처진 국가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국내 상황 속에서 외국으로 파견된 지식인들이 보고 온 세상은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세련되고 우리의 기술을 훨씬 앞서가고 있었죠. 이를 보고 온 그들은 자각했습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과정에 신문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이러한 생각이 한성순보와, 이를 계승하는 한성주보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두 신문 모두 목적을 이루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많았습니다. 정책 관련기사를 주로 담는 관보 1의 성격이 강했고, 순 한글을 완벽히 채택하지 않아 한글조차 어려운 백성들에게는 읽을 수조차 없는 신문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1896년,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을 때의 반응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순 한글로 구성되어 이전에 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그 어떤 신문들보다도 대중을 주 독자층으로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습니다. 한글판과 영문판을 따로 두었으며 특히 한글판의 가격을 2푼으로 영문판(5푼)의 절반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책정해 모두가 부담 없이 사서 읽어보게 했습니다.
당시 신문이 지니고 있던 큰 문제는 '접근성'이었습니다. 먹을거리조차 사먹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문으로 되어 읽기도 어려운 신문을 비싼 돈 주고 볼일은 더욱 없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고자 독립신문은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정부나 제 3자의 간섭을 받지 않고 창간자인 서재필과 독립신문의 주도하에서만 제작이 이루어져 열강의 침략과 탐관오리에 대한 비판이 적나라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내용들은 국민들에게 전해져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진정 알아야 할 사실이 무엇이며 무조건적, 반자의적인 계몽이 아닌 스스로 변화에 대한 자각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치부를 들킨 관리들에게 이는 언제나 눈엣가시였고 결국 서재필은 미국으로, 독립신문은 그 판권이 인수되어 단 3년 만에 폐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의의와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1957년 한국 신문 편집인 협회는 독립신문의 창간일인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 언론 투쟁의 역사
▲기사 삭제와 신문 압수 수치
초창기 민족 언론의 탄생을 지나 점차 다양한 신문이 등장했고, 각각의 신문들은 일제의 침략과 우리 민족이 외세로부터 받고 있는 압박들에 대한 소식들을 하나하나 전했습니다. 을사늑약 직후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위암 장지연 선생이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희대의 명문으로 당시 신문이 단순히 소식을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사건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민족의 한을 대변해주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문의 저항들은 일본에게 민족적 압박을 할 수 있는 좋은 이유가 되었고 소위 내용조차 제대로 담을 수 없는 '벽돌신문'이라는 신문들이 생겼습니다. 철저한 검열 아래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 글은 전혀 없는 친일지들만이 남았습니다.
▲베델의 태극기
국내 상황이 열악해지자 해외로 이주한 교포들이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우리의 신문을 계속해서 만들며 투쟁과 언론의 불꽃이 사그라들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우회를 통한 신문제작도 이루어졌습니다. '대한매일신보, The Korea Daily News'는 영국인인 '배설(Ernest Thomas Bethell)'을 발행자로 하여 비교적 적은 탄압과 함께 자유로이 일제에 대한 비판을 했습니다. 후에 배설의 장례식에서는 태극기가 관 위를 덮었는데 이 태극기는 신문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며 자신의 민족은 아니었지만 동지 된 마음으로 함께 힘을 써준 그에게 깊은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탄압 속에서 이루어진 일제 치하 2 속 언론의 활발한 활동은 많은 이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이를 중심으로 국민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시작, 다양한 자발적 항일 운동을 했습니다. 언론의 주도하에서 국민들은 스스로 깨달았으며 항일 운동을 진행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글을 모르는 국민도 깨우칠 수 있도록
▲신문 만화와 신문 광고
하지만 문맹률은 여전히 높았고 국민들 중 일부는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모르는데 어찌 신문을 읽을 수 있을까요? 마음은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국민들은 벙어리 가슴이요, 막막할 따름이었습니다. 당시의 언론인들이 느꼈을 절박함 또한 컸을 것입니다. 신문만화의 등장은 이러한 심정을 담아냈습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그림들과 길지 않은 문장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제의 만행을 신문 안에 상세히 담았습니다. 지금 보아도 수준이 높은 작화와 글 구성들은 누구나 공감하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손기정 선생의 사진
사진보도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등을 하고서도 민족적 아픔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손기정 선생의 가슴 속 일장기를 지운 모습에서 사진으로나마 그 아픔을 공감 해주었고, 이와 같은 몇 장의 사진들은 때로는 긴 문장보다 국민들에게 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외에도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한 광고들은 관심을 불러 모았고 우리가 과거를 넘어 근대로 나아가도록 일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996년 69.3%에 달했던 국내 신문구독률이 작년에는 14.3%로 큰 폭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돈이 없어서 신문을 읽지 못했지만, 이제는 지나칠 정도로 다양한 눈요깃거리들로 인해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언론에 대한 불신도 한 몫을 합니다. 언제부턴가 '기레기'라는 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신조어를 어디에서나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회 수를 늘리기 위해 단순 흥미성 기사로 독자들을 유인하는 기자들을 비꼬는 말이지요. 하지만 좋은 기사와 기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노력해야 합니다. 모바일 기기와 SNS 사용이 읽는 문화를 보는 문화로 변화시켰고, 눈에 잘 들어오는 기사만으로 시선을 확 끌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내용의 탄탄함을 포기한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기자의 책상, 민족의 언론인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일제시대에 배우기를 원했던 조상들과 같은 태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했기에 신문은 이런 기대에 부응했고 글을 쓰고 가르치며, 그림을 그렸고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것입니다. 과거보다 배움도 지식도 부족하지 않은 지금의 우리는 신문을 보며 많이 아는 만큼 더욱 깊게 이해하고 올바른 의제 설정과 길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두운 시대의 등불 역할을 했던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그 날 그때의 정신과 노력이 현재의 모습으로 인해 퇴색 되지 않도록 모두가 도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문 또한 다시 한 번 우리의 기대에 부응할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문이라는 사실이 이를 행동하기 위한 충분한 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신문 박물관을 찾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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