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을 통해 깨달은 신문, 읽기로 봉사한 소녀

2011. 9. 19. 09:06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의 낭독은 신문 마지막 쪽에 있는 칼럼을 읽다가 끝났다. 많은 양이 아닌데도, 목표한 양만큼 신문을 읽으면 세 시간 정도가 걸린다. 그 이름도 무거운 고3 겨울방학에, 나는 난생 처음 낭독봉사를 용기 내어 시작했다. 처음으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읽어주는’ 신문을 접하면서 생각해온 일이었다. 지면 위에 바코드를 인식하는 출력기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이 신문을 ‘듣는다’는 다른 방식이 놀라웠고, 자연스레 낭독을 통한 도움이 떠오르던 참이었다. 그와 함께 나는 ‘세상을 읽고, 선택할 권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가 자신이 세상을 보는 눈이 되었다며 ‘읽을 선택권’을 말하는 시각장애인의 인터뷰였다. 그 속에서 생각해 보지 못하고 놓쳤던 부분, 신문을 비롯한 세상읽기에 대한 고민에 빠져볼 수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없었던 세상을 읽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이 소중한 권리를 어떻게 행했을까? 무엇을 읽었는지 잠깐 생각해봤다. 인터넷에서 연예인들
을 다룬 조금은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반사적으로 클릭해서 읽었고, 아침에는 빠르게 연이은 뉴스들을 쳐다보다 나갔다. 시내에서는 광고 카피들을 읽다가 온다. 수동적이었다. 정작 나는 세상을 읽고 있다고 단지 믿기만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선택하여 세상을 찾아 읽는 권리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책과 함께 신문이 와 닿았던 순간은 그때였다. 여러 매체와 이미지들이 ‘보여주기’에 급급한데 신문이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 읽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건 하나를 짚어 볼 때 도, 가만히 ‘들여다보는’ 관심과 함께 깊이 있는 시선 그리고 생각을 필요로 했다. 오후에 교무실에 내려가 선생님들께서 다 보신 신문을 가져와 읽기 시작했고, 밑줄을 긋기도 했다. 그와 함께 학교에서 억척스럽게 추진했던 사설 칼럼 100편 읽기 운동에서 느꼈던 문제점이 자연스레 풀려갔다. 사설이나 칼럼을 먼저 보기보다 누군가의 시각과 생각을 떼어내 ‘사실’ 자체를 들여다 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일방적으로 정보를 단순히 전해들을 때도 그렇다. 신문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생각의 서재에 버거운 반 쪽짜리 책이 아니라 ‘스스로’ 고른 개념 중심의 간결한 책들을 탁탁 꽂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나의 세상 읽기는 그렇게 신문과 함께했다. 시각장애인 분들을 통해 처음으로 ‘권리’를 알고, 찾아 애쓸 수 있었다. 멀리서 나를 간접적으로나마 일깨워 주셨던 그분들의 권리를 찾는 데 도움을 드리고 싶어 신문과 책을 조금씩 낭독했다. 낭독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문을 찾아 들음을 지팡이 삼아 세상을 짚어가는 누군가와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우리 각자에게 있기에 ‘많이 접했고, 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보여지는 세상’에 머문다면,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우리는 ‘읽음’으로 세상을 짚어야 한다. 세상을 찾아 읽고, 선택할 권리를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2011년 신문논술대회 수상작 모음집>중 동상 고등부 수상작 오서영 님의 ‘세상을 읽고, 선택할 권리’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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