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0. 16:35ㆍ웹진<미디어리터러시>
여성 혐오(misogyny)는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멸시, 비하하는 정서·표현· 태도로서 고대 그리스 신화 및 문학에도 나타날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한국 사회에서 사이버상의 여성 혐오는 2000년대 이후 특정 사이트를 중심으로 디지털 하위문화인 놀이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여성 혐오 문제는 사이버상의 단순한 ‘표현’ 문제가 아니다. 표현이 갖는 위력은 위계적 권력 구조에서 화자의 권력에 따라 달라진다. 여성 혐오 표현은 권력의 문제이다. 여성 혐오를 다루는 미디어의 권력 구조가 잘 드러난 사례로 지난여름 도쿄 올림픽 여자양궁 금메달 3관왕인 안산 선수에 대한 일련의 온라인 폭력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글은 당시 사건의 진행과 언론의 보도 과정을 살펴보고, 디지털 미디어에서 전개된 여성 혐오에 맞서는 효과적인 방안을 알아보겠다.
피해자를 남성 혐오 가해자로 둔갑시켜
안산 선수의 ‘숏컷’이 ‘페미’의 증거라는 폭력적 비난은 여자 양궁 금메달 3관왕의 쾌거를 거두기 얼마 전 온라인에서 시작됐다. 이에 맞서 각계 여성들이 ‘숏컷’ 지지 캠페인을 벌였고, ‘숏컷’이나 ‘여대 출신’을 근거로 제시한 ‘페미’ 주장이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온라인 댓글을 중심으로 안산 선수가 ‘허버허버’, ‘오조오억’1) 등 ‘남혐’2) 용어를 쓴 과거 사례를 들어 메달을 박탈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올림픽에 나선 국가대표 선수에 대한 온라인상의 언어폭력이 점점 심해지면서 개인의 인권 침해와 명예 손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자 대한양궁협회가 온라인 언어 테러 중지와 선수 보호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후 각계의 지지 선언이 이어지면서 미디어 보도와 온라인에서의 비난 표현이 점차 감소하고 사건은 일단락됐다.
온라인에서 주목을 끌려는 의도에서 나온 자극적 발언이 눈덩이처럼 커지며 선수에 대한 언어적 테러로 확산된 과정에서 우리나라 언론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당시 언론 보도에서 두드러진 ‘안산, 페미 논란’, ‘여혐과 남혐의 충돌’ 프레임 및 어뷰징 기사들은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젠더 갈등’ 담론을 형성했다. 특히 다수의 언론이 안산 선수가 남성 혐오 표현을 사용했다는 국민의힘 양준우 대변인의 언급을 기사화하며 제목에 ‘따옴표’를 사용해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등 혐오 발언의 증폭을 통해 젠더 갈등을 확대시켰다. 언론의 대표적인 긍정적 기능인 사회의 문제점을 경고하는 환경 감시, 집단 간 대립을 초래하는 갈등의 조정, 시민의 합리적 판단을 이끄는 정확한 정보 제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온라인 뉴스의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제목과 내용에서 자극적 표현 및 프레임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 대부분의 언론과는 다르게, 잘못된 문제 제기와 확증 편향을 지적하고, 안산 선수에 대한 온라인 폭력 사태를 심도 있게 분석한 소수의 미디어와 기자도 있었다. 예를 들어 “페미 ‘논란’이 아니라 ‘폭력’이다”(<한겨레> 8.3.), “허스토리-안산을 공격한 분들께 보내는 편지”(<한국일보> 8.14.), “‘안산 페미 논란’처럼 ‘페미 찾기 놀이’ 계속되는 이유는”(<YTN> 8.9.)3), “언론이 이름 붙이는 ‘논란’…그 실체는?”(<KBS> 8.29.)4) 등은 시민들이 혐오와 차별의 미로를 벗어나도록 이끌었다. 이들 보도는 ‘페미 색출 놀이’나 ‘페미 검증’이 분명히 여성 혐오 표현임을 지적했다. 당초 논란이 되기 어려운 사안을 ‘안산, 페미 논란’으로 보도함으로써 폭력의 피해자인 안산 선수를 남성 혐오의 주체로 만드는 악의적 프레임이라고 비판했다.
연대와 지지의 힘을 보태자
안산 선수에 대한 ‘페미 색출 놀이’ 온라인 폭력 사태는 기시감이 있다. GS25, 스타벅스, 다이소, 카카오뱅크, 카카오톡, BBQ, 이마트24, 교촌치킨, 농심, 동서가구, 경찰청, 전쟁박물관 등 수많은 기업과 기관이 아무런 근거 없이 ‘남혐’이라고 주장하는 ‘집게손가락’ 이미지 때문에 공식 사과문을 내고 이미지를 철회했다. 심지어 전쟁박물관은 “숨어 있는 메갈리안을 전수조사해서 권고사직 바란다”는 게시판의 주장에 대해, 메갈리안 사이트가 만들어지기 2년 전의 그림을 철수시키는 해프닝도 있었다([사진] 참조).
전쟁기념관 로비 포토존 배경 속 손가락 이미지. 2013년 제작 설치됐지만 홈페이지 게시판에 항의 글이 올라오자 전쟁기념관 측은 관련 시설물을 즉시 철거했다. <사진 출처: 한겨레(2021.6.8.)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98524.html>
‘페미 검증’은 몇 년 전부터 시작된 혐오 표현이다. 2018년 3월에는 가수 아이린이 휴가 동안 읽은 책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언급한 뒤 ‘페미 선언’이라며 온라인 공격을 당했다. 당시 ‘아이린에 대한 온라인 폭력’을 다룬 보도의 관점에 대해 TV 칼럼니스트 이승한은 “여성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미가 보이면 억압하려 드는 몇몇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난동이었는데, 수많은 기사의 제목은 이를 ‘페미니스트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오해를 사서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해프닝’인 것처럼 기술했다”고 지적했다.5) 무엇보다 SNS의 혐오 표현을 ‘여론’인 양 매개 전달하는 언론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공론장이라고 할 수 없다. 이들은 조회 수(클릭 수)를 높이기 위해 어떠한 비윤리도 서슴지 않는 끔찍한 자본 기계일 뿐이다.
이번 안산 선수에 대한 온라인 폭력이 비교적 조기에 진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우선, 양궁협회가 선수 보호라는 기본에 충실한 대응을 해주었고, 안산 선수를 향한 대중적 대항의 목소리(숏컷 지지 선언 등)와 이에 더해 29개 여성 단체, 민주노총, 언론노조 성평등위원회 등이 논평이나 성명을 내면서 연대와 지지의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6)
앞으로 비슷한 일이 발생할 때 언론은 이에 대해 ‘논란’, ‘젠더 갈등’ 등의 이름을 붙이며 사회적 어젠다로 띄우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혐오 표현에 대해서는 명백한 온라인 폭력으로 규정해야 한다.
기업도 억지 주장에 쉽게 굴복하여 사과하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 기업의 빠른 사과와 관련자 문책이 ‘손가락 이미지=남혐’의 인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론과 기업은 그들이 원하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일종의 학습 효과를 낳았다. 손가락 이미지에서 숏컷, 허버허버, 오조오억 등 ‘남혐’을 주장하는 단어는 계속 변주될 것이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의 억지 주장은 단지 소비 자본주의와 남성 우월주의, 그리고 페미니즘(‘여성 우월주의’로 오해)에 대한 백래시가 얽혀 형성된 뒤틀린 파괴 욕망에 불과하다.
한편 정치권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에 힘써야 하며 명백한 차별과 혐오 표현을 ‘갈등’으로 치환하여 정치적 의제로 삼지 말아야 한다.
지혜 길러줄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여성 혐오를 포함한 혐오 표현 대응 방법을 총망라해보면, 행위 규제와 환경 조성의 조치로 크게 나눌 수 있다.7) 첫째, 행위 규제에는 형사 규제(형사 처벌), 민사 규제(손해배상, 가처분), 행정 규제(차별 구제, 방송심의, 통신심의) 등이 있고, 자율 규제로는 기업, 대학, 단체, 인터넷 사업자의 혐오 표현 금지 정책이 포함된다.
환경 조성에는 교육(초/중/고/대학 인권 교육, 언론인 및 공무원 인권 교육, 시민 인권 교육), 홍보(대국민 홍보 캠페인을 통한 인식 제고), 정책(국가, 지자체의 혐오·차별 대응책), 지원(소수자 집단에 대한 보호·지원), 연구(혐오, 차별 문제에 대한 조사·연구), 기업·시민 사회의 정책(기업, 대학, 단체, 인터넷 사업자의 혐오 차별 대응, 인권 시민 단체의 반차별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대응책은 중단기적 대책으로서 차별·혐오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계의 책무와 노력이 요구된다.
당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대응책은 기술적 조치와 교육이다. IT 기업은 혐오 표현이 소수자에게 심각한 위축 효과를 가져 오며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온라인 플랫폼에서 혐오 표현을 기술적으로 삭제할 수 있도록 자율 규제 시스템을 마련하고 시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임금님은 벗은 몸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지닌 어린아이의 눈과 용기를 갖게 해줄 실효성 있는 미디어 리터리시 교육이 절실하다.
1) ‘허버허버’(무엇인가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의미), ‘오조오억’(매우 많음을 뜻하는 표현)이 남성 혐오 표현이 되려면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폭력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져야 하는데, 이러한 단어는 일종의 신조어로 사용될 뿐이다.
2) 엄밀한 의미에서 ‘남성 혐오’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혐오는 권력의 위계 구조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 및 폭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 김양원·김언경. “‘안산 페미 논란’처럼 ‘페미 찾기 놀이’ 계속되는 이유는” <YTN> 열린라디오 YTN 대담. (2021.8.9.)
https://radio.ytn.co.kr/program/?f=2&id=78127&s_mcd=0211&s_hcd=09
4) KBS [질문하는 기자들Q] “언론이 이름붙이는 ‘논란’…그 실체는?” (2021.8.29.)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67119&ref=A
5) 이승한. “그것은 ‘페미니스트 논란’이 아니라 ‘사이버불링’이었다” <한겨레>. (2018.3.23.)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7433.html
6) 이혜미. “[허스토리] 안산을 공격한 분들께 보내는 편지” <한국일보>. (2021.8.14.)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80515480005031?1628989200373
7) 이승현·이준일·정강자·조혜인·한상희·홍성수 (2019). 혐오 표현 리포트, 국가인권위원회.
본 원고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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