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를 듣고 언뜻 떠오른 소설 <노기자의 죽음>

2012. 1. 25. 09:10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기자론1-오인문의 <노기자의 죽음>2


“낯 뜨거운 고백이지만, 중앙선관위 홈페이지를 공격한 것은 여당 국회의원의 비서였다는 경찰의 충격적 발표를 접하고 우선 떠오른 건 ‘나꼼수’였다. 10·26 재·보선 당일 아침 선관위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신문은 내막을 파고들지 않았다. 막연히 북한의 소행 가능성을 언급했을 뿐이다. 반면 나꼼수는 ‘합리적 의심’을 근거로 투표율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계획적 범행 가능성을 물고 늘어졌다. 결국 경찰 수사로 나꼼수가 제기한 ‘음모론’이 일정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이명박(MB)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의혹을 처음 터뜨린 것도 나꼼수였다. 사람들이 신문을 외면하고, ‘나꼼수 4인방’에 열광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 독자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 그것이 신문이 살 길이다. 기자들이여, 각성하자. 언제까지 나꼼수의 ‘특종’ 행진을 지켜만 볼 것인가. 이러다 밥그릇 다 날아간다.” (배명복, 2011.12.5)



배명복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칼럼에서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나꼼수> 현상을 이 같이 지적한 뒤 기자들이 이제는 중요한 사건사고 등에 대해 의심하고 파헤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기자들이 진실 추구라는 기자 정신에 좀 더 전력을 기울이라는 질책이자 당부인 셈인데요. 배 위원뿐만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 기자 정신이 회복 또는 부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단순한 주문과 질책을 넘어 압력으로, 함성으로 변해가는 양상이죠.

 
앞에서 지적했지만, 기자 출신 소설가 오인문씨의 1987년 연작 소설집 『노기자의 죽음』의 첫 번째 소설인 <노기자의 죽음>에서도 1960년 4·19혁명과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M일보 민완기자 박수득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전쟁의 의미와 전쟁 보도뿐만 아니라 기자의 실존과 존재 의미 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사진> 1987년 고려원판
 

박수득 기자의 친구인 김현구는 소설 곳곳에서 우리 시대 기자의 실존과 존재 의미를 다소 도발적이고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김현구는 먼저 자신의 글에 대해 현실주의적 사고로 비판하는 M일보의 조 기자에게 묻습니다.


강판을 마치고 우리 방에 들어온 조 기자가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내가 읽던 걸 그만두고 그에게 눈인사를 하자 그는, 
“이걸 보니, 참 세상엔 별난 바보도 다 있다는 느낌이야. 세상살이란 건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고, 그저, 돈이나 실컷 벌어서 놀고 싶은 대로 놀다가 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런 걸 가지고 괜히 인생이 뭐 어떻고 제 딴엔 잔뜩 심각한 모양이지만, 남들이 보면.”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웃음거리밖에 안된단 말야. 하하.”

김현구가 그를 획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그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나는 그가 무슨 소란이라도 피울까 봐 손을 들어 말리는 시늉부터 했다...(중략)...
볼만해요. 종자는 똥개인 모양인데 어떻게나 쳐먹었는지 살이 뒤룩뒤룩 쪄 가지고 몸을 이기질 못해요. 그래서 보신탕을 먹을 때마다 나도 저렇게 살이 찌겠거니 싶어 맛이 더 난다나요, 허허허.”(31~32쪽)


즉 김현구는 기자 등 현실에 경도된 사람들에 대해 ‘살찐 개’로 비유합니다. 이들은 현실에 얽매이고 의미와 이상을 잃어버리면서 사육되어지고 결국 폐기되고 마는 개 같은 존재일뿐이라는 것이죠. ‘보신탕집 개가 될 것인가? 아니면 배고프지만 길가의 똥개가 될 것인가’라고 묻는 셈이죠.
 
하지만 박수득 기자는 김현구의 이 같은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맞서면서 기자의 실존과 존재 의미는 전면으로 부각됩니다. 박수득은 김현구이야말로 현실에서 벗어난, 관념의 온상에 빠진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즉 길거리의 호떡장수조차 책과 머리 속의 철학이 아니라 순전히 몸뚱이로 깨친 그들 나름의 철학이 있다고 주장하죠. 박 기자의 입장은 현실 속 기자들의 항변일 수도 있겠죠. 물론 김현구는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박 기자가 소리를 꽥 지르며 신문지를 내동댕이쳤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겁하고 불쌍한 녀석이 김현구, 바로 너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서푼어치 가치도 없는 관념의 유희에 빠져 가지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너는, 이 세상을 자기 혼자 다 안듯이 자만에 빠져 있단 말야.”
그 말에 김현구는 가장 아픈 곳을 찔린 듯 볼을 움찔거렸다. 그걸 보고 박 기자는 더욱 거칠게 김현구를 공격해 들어갔다.
“관념이라는 온상에서 빨리 벗어나라구. 살찬 시베리아 바람 속에서도 한번 견디어 내봐. 어린애들 코 묻은 돈을 받아 먹고 사는 호떡 장수들도 그들 나름의 무슨 신조가 있다. 머리고 익힌 철학이 아니라 책 한 페이지, 말 한 마디 듣지 않고도 순전히 몸뚱이로 깨친 그들 나름의 철학이 말야.”
“하하, 두뇌란 건 몸뚱이의 시녀 노릇이나 하라는 얘기군. 배가 고프니 빵 조각을 생각하고, 배가 부르니 낮잠이나 자고……그러다가 엉덩이에 종기 하나만 나도 약을 바르고, 굵어 파고, 낯을 찡그리고……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가 온통 그 종기 문제가 되어야 옳다는 얘기지?”
“아냐, 잘못 본 거야. 너는.”
“아무리 눈을 뜨고 봐도 모든 건 뒤죽박죽하고, 보신탕집의 똥개 천지란 말야.”
“그럴수록 너는 책임감을 느껴야지. 그 똥개들도 마음속으론 느끼고 있는 거야. 자기 자신 속에 무언가 커다란 것이 모자란다는 것을……”
그 말에 김현구가 코웃음을 쳤다.
“그들에게 모자라는 것은 돈과 명예일 따름이고, 남는 것은 정액이야.”
“아냐, 아냐.”
박 기자가 김현구의 손을 잡아 흔들며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 똥개들도 무언가 찾고 있어, 온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바치고도 하나 후회하지 않을 지극히 높고 큰 무엇인가를 말야. 그 극치의 장점을 찾아 제시해 주는 게 너의 사명이라고 너는…….”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김형구가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 하하하…….”(32~33쪽)



김현구의 기자 등에 대한 비판에 기자 박수득은 ‘어린애들 코 묻은 돈을 받아 먹고 사는 호떡 장수들도 그들 나름의 무슨 신조’가 있다며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옹호합니다. 김현구가 존재 의미가 없는 것으로 지목하는 ‘똥개들도 마음속으론 느끼고 있다’고 그는 맞받아치죠.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나름의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고 고뇌를 안고 살아간다고 현실에 대한 옹호와 이상에 저항을 시도하는 셈이죠. 
  
하지만 김현구가 4.19혁명이 발발하자 나중에 경무대 앞 시위에 참여, 바리케이드 철조망을 받친 나무를 톱으로 자르려다 사살되면서 박 기자는 기자의 실존과 의미를 거듭 고민하게 하죠. 결국 박수득은 김현구의 죽음으로부터 기자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찾고 베트남 전쟁 현장에서 불꽃 같은 취재를 하다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때 박수득의 모습은 현실에 있으면서도 이상에 대해 고민하는, 이상을 꿈꾸면서 완강하게 현실에 발디딘 기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실과 이상의 양가적 가치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결국 김현구에서 도발되고 박수득의 죽음에서 꽃핀 문제의식과 실천의 불덩어리는 소설의 화자이자, 원래 알피니스트였다가 M일보에 입사한 이 기자에게 옮겨 붙는 양상입니다. 이 기자는 이제 박수득의 문제의식, 현실과 이상, 이상과 현실의 긴장관계적 조화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됩니다. 


그는 포켓에다 두 손을 깊이 찔러 넣은 채 머릴 떨군다. 나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너는 그럼 행복해지고 싶단 말이지? 남이 막걸리를 마실 때 넌 바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고, 사장의 한마디 칭찬 때문에 그만 황송해져서 가슴 부푸는 그런 행복을…….”
“비웃어도 좋아. 박 선배를 누구보다도 존경했던 나는 오늘 무척 고민을 했어. 하지만 나는 박 선배만한 용기도 없을 뿐 아니라 지금 무척 피곤해. 어서 리베를 만나, 빠알간 입술과 풍만한 젖가슴으로 내 눈을, 내 얼굴을, 아니 내 마음까지도 온통 덮어 버리고 싶어.”
“빌어먹을.”
나는 장례 행렬을 돌아본 다음 몽블랑을 향해 또 올라갔다. 장 기자가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른다.
“장 기자.”
대답이 없어 돌아보니 그는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나는 아까 장례 행렬을 따라가며 이런 생각을 했어. 저들이 박 선배의 꽃상여를 메고 가는 게 아니라 박 선배가 저들의 꽃상여를 메고 가는 게 아닐까고…….”(48쪽)


소설은 결국 김현구-박수득 기자-이 기자로 이어지는 알고리즘을 통해 기자 또는 모든 현실에 기댄 존재들에게 이상이냐 현실이냐, 아니면 그 너머 이상과 현실의 긴장 속 조화를 이뤄갈 것인가 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던지는 셈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질문이 1960년대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팟캐스트 <나꼼수>가, 그리고 소설 속 박수득이 오늘의 기자들에게 기자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이냐 묻고 또 묻습니다.   


<참고문헌>
배명복(2011.12.5). <분수대> 언제까지 신문은 나꼼수의 ‘특종’ 행진을 지켜만 볼 것인가. 『중앙일보』. 35면.
오인문(1987). 노기자의 죽음. 『노기자의 죽음』. 서울: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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