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르포, 외국인 노동자가 무서운가요?

2012. 7. 10. 09:25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많은 외국인들이 자원순찰대로 활동한다




2012년 4월 ‘수원 토막살인사건’이라는 제목이 달린 기사의 내용은 끔찍했다. 조선족 오원춘이 한국 여대생 A씨를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살인을 저지르고 시신을 토막 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족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그 여파는 오씨 개인을 넘어 조선족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 전체로 퍼져나갔고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현상은 위험수위까지 치달았다. 그리고 언론은 더욱 자극적인 제목과 기사로 이 현상을 부추겼다. 분명 외국인이 저지른 충격적인 사건임은 확실하지만 과연 모든 외국인 노동자가 이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전국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국경 없는 마을’을 찾아 의문을 풀어보기로 했다. 







“그들은 범죄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다”


원곡동 취재를 결정하자 사진부 선후배들은 걱정을 가장한 겁주기를 시작한다. “어두워지면 취재 접어라”, “경찰과 동행해라”, “지갑에 돈을 미리 챙겨서 가라” 등등. 잔뜩 위축된 상태로 도착한 일요일 오후 원곡동은 한자와 알 수 없는 문자로 장식된 간판과 여러 국적의 외국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내국인이 와도 이곳에서는 이방인이 된 듯해 이질감을 느낄 법했다. 중국식 요리와 식자재를 파는 시장의 모습은 분명 카메라에 담고 싶을 만큼 이색적이었지만 분위기에 눌려 쉽게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시장거리를 여러 번 배회하는 내 모습을 알아차린 한 중국식 빵집 주인이 빵을 먹어보라며 말을 건넸다. 반가운 마음에 의자까지 끌어다 자리를 잡았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묻자 주인도 말문을 열었다. 30분 넘는 오랜 대화였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인보다 순박하다.” “이들은 한국에서 범죄와 같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두려움을 덜어내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취재를 시작했다.



 한국어보다 외국어 간판이 많은 원곡동 거리(왼쪽), 한글을 공부하는 모습(오른쪽 위), 방글라데시에서 온 수초코씨는 한국인과 친해지고 싶다고 말한다(왼쪽 아래)




방글라데시의 설날기념행사에서 만난 인도네시아인 수초코 씨는 외국인자원순찰대로 활동한다. 일당도 없고 비자발급에 특별한 혜택도 주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수코초 씨는 한 달에 한 번씩 휴일을 자원봉사에 반납하고 있었다. 취재를 떠나 고마운 마음에 화장지와 세제 등 집들이 선물을 사들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 고추장이 듬뿍 들어간 닭볶음탕 요리와 무알코올 맥주를 대접받으며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을 닮아가고 싶고 한국에 젖어 들고 싶다고 말하는 표정에서는 한국에서 받는 따가운 시선에 대한 서러움이 엿보였다. 미안했다. 이후 취재를 위해 네 번 더 안산을 찾았다. 대부분은 마감을 끝내고 갔기 때문에 한밤중이었다. 그리고 주취자가 가장 많이 모인다는 ‘국경 없는 마을’ 내 문화공원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혹시 내가 간과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검증차원에서였다. 휘청거리고 큰 목소리로 떠드는 주취자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인 모습의 취객은 만날 수 없었다. 



▲가족사진을 보고 있는 수초코씨 





잠재적 범죄자는 누구


2011년 안산 단원구의 범죄 발생 건수 총 1만 3,670건 중 외국인 범죄는 458건으로 전체의 3.36%에 불과했다. 외국인 인구비율이 10%임을 감안하면 내국인보다 훨씬 낮은 사건 발생률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항상 의심과 두려움 섞인 눈총에 시달린다. 기사가 게재된 이후 많은 항의메일을 받았다. 메일 내용은 모두 “외국인 노동자는 잠재적 범죄자인데 왜 이들에게 호의적인 내용의 기사를 쓰느냐”라는 식이었다. 내가 취재하면서 느낀 점을 그들이 공감하지 못했다면 내 기사와 사진이 미흡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코초 씨는 한국인과 함께 무엇이든 하기를 원했다. 서울신문 하프마라톤 대회에도 신청을 부탁했다. 그리고 대회가 있었던 그날 오후 그는 완주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7월호 중 서울신문 정연호 기자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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