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 부부에게 내려온 ‘기특이’ 이야기

2012.11.21 09:41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기억하기로, 아버지의 휴대전화 요금은 늘 만 원 정도였다. 기본요금이 저렴하고 초당 요금이 비싼 형태의 요금제를 쓰는 덕분이다. 운전을 직업으로 하는 아버지는 휴대전화가 일반에 보급되는 초기부터 사용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꼭 필요한 통화 외에는 거의 하시지 않는다.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건 상상을 못했다. 아버지는 문자메시지를 보낼 일이 있으면 늘 어머니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것도 연말연시, 설이나 추석 때 지인들로부터 온 의례적인 메시지에 의례적인 답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올라온 스무 살 이후, 아버지와 긴 시간 통화를 한 건 재작년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인 아버지와 나는 서울에 오기 전에도 그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날 나는 연말 인사를 드리려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는 밥은 잘 먹고 있나, 회사는 잘 다니냐, 너만 잘 있으면 된다, 이런 정도만 묻고서 끊으시는 ‘1분 통화’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내게 오랫동안 이것저것을 당부하셨다. 회사에서의 행동거지라든지, 인생을 살아보니 이런 건 주의해야한다든지, 앞으로의 진로라든지 여러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지금은 아쉽게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날의 통화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아버지는 흔치 않게 줄잡아 30분을 넘게 말씀하셨다. 끊고 나니 머쓱해서 앞으로 자주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또 생각뿐이었다.





지난달 아내가 불쑥 보낸 문자를 보고 놀란 건 그래서다. 아내의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기특이’의 정밀초음파를 받으러 간 날이었다. 입체영상을 통해 아기의 건강을 점검하고 얼굴까지 입체로 볼 수 있었다. 거친 영상 입자 때문에 조금은 일그러지긴 했지만 통통한 얼굴과 납죽한 코, 채 뜨지 못한 조그만 눈이 손에 만져질 듯했다. 그동안 늘 아기가 뱃속에 있다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니 더 실감이 났다. 아내와 나는 누굴 닮았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면서 신기해했다. 아내는 그 사진을 보여드리고 싶다며 아버지, 어머니의 휴대전화로 전송했다. 그러고 3시간쯤 지났을까, 아내는 아버지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내게 다시 보내주었다.






아버지가 이런 메시지를 보내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문자메시지를 쓸 줄도 모르실텐데 누군가에게 보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셨던 걸까. 나중에 어머니에게 여쭤봤다. 본인이 직접 보내셨다고 하셔서 당신도 놀라셨단다. 어머니도 신기해하셨다. 안 해서 그렇지 당신도 하면 다 할 수 있다고 그러셨단다. 어머니는 할 줄 아는 사람이 왜 늘 부탁을 했냐고 핀잔을 주셨다나. 그제야 문자메시지의 한글자한글자가 눈에 다시 들어왔다. 문장 앞뒤로 밑줄까지 긋고, 띄어쓰기 하나까지 맞추려고 신경 쓴 테가 역력했다. 신중히 버튼을 누르셨을 아버지의 손이 떠올랐다. 뭉특하고 투박한 손가락이 오타를 내기도 하셨을 테다. 서투른 손길에 몇 번을 다시 누르고 지웠다 다시 썼다 하셨을까.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지난 4월 ‘기특이’가 우리에게로 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 사실을 전해드렸을 때도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는 잘 느끼지 못했다. 곁에 있었다면 더 잘 느낄 수 있었겠지만 그냥 ‘좋아하시겠지’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버지는 평소 늘 내게 팔뚝을 들어 보이며 ‘니가 딱 요만했는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머니가 음식을 준비 하느라 부엌에 들어가면 나는 엉엉 울어댔고 아버지는 팔뚝에 나를 얹고 잠들 때까지 동네를 몇 바퀴씩 도셨다고 한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처음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정말 좋아하셨다고 한다. 당시 산후조리를 해 주시러 집에 계셨던 할머니가 뭘 사오라고 시키면 득달같이 달려갔다 오곤 했단다. 지금도 어릴 때 사진을 보면 나를 꼭 보듬어 주시는 아버지가 늘 곁에 있다. 아버지와 나는 때로 씨름을 하기도 하고, 나란히 잠옷을 입고 누워있기도 하며, 산 중턱 바위 위에서 꼭 끌어안고 있기도 하다. 아버지의 오토바이 위에 올라가 폼을 잡은 사진이나 처음 부반장이 됐다고 명찰을 달고 포즈를 취한 사진의 뒤에는 아마도 아버지가 있었을 테다.


언젠가부터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억지로 그렇게 한 건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컴퓨터에 빠지거나 친구들과 어울려다니면서, 혹은 한 줌도 안 되는 알량한 자의식을 만들어가면서부터였을까. 하긴, 아버지가 무뚝뚝하다고 적긴 했지만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 무뚝뚝하기로는 나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서울로 올라오고부터는 집에 내려갔을 때 뵈는 것 외에는 더욱 시간이 줄었다. 전화는 1년에 한두 번 할까말까였다. 그러다보니 더욱 화제가 줄어들어 대화가 길게 되지 못하곤 했다. 한데 어느 날 거울 앞에 선 나는 흠칫 놀랐다. 머리에 착 달라붙은 짧은 곱슬머리, 크다고도 작다고도 할 수 없는 눈, 무춤한 콧날, 짧은 인중에 이어지는 약간 들린 입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상이었다. 바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점점 멀어질수록 나는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오토바이는 못 가는 곳이 없었다. 아버지의 등에 기대 달리면서 설핏 잠드는 것은 위험하면서도 달콤했다. 아버지는 허리춤을 잡은 내 팔 힘이 약해지는 걸 느끼시면 늘 오토바이를 세우고 가게에 들러 잠 깨라며 아이스크림을 사 주셨다. 지금도 택시를 운전하시는 아버지는 못 가는 곳이 없다. 때로 구미에서 인천공항까지도 왔다갔다 하신단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늘 아버지는 오토바이도 승용차도 아니라 당신의 등 위에 나를 얹고 부지런히 달려오셨던 것 같다. 꺼지지 않는 엔진을 가슴에 품은 채로. 쉼 없이 달려온 아버지가 깨알같이 기록한 운행일지의 행간에는 아버지의 삶뿐만 아니라 내 삶도 빼곡히 새김질돼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수많은 곤경과 역경을 물리친 만화 속 영웅은 아니지만, 매일같이 지치지도 않고 좀비처럼 다가오는 일상이라는 적을 물리친 ‘영웅’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곧 ‘기특이’가 우리에게로, 이 세상으로 온다. 아이의 출산용품을 정리하면서 그 젊은 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배냇저고리를 만지작거리다보니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아이의 크기는 팔뚝만할 것 같았다. 내가 팔뚝만 했다는 아버지의 말은 그땐 ‘구라’인 줄로만 알았다. 당연할 테지만 아이 물건은 뭐든 작았다. 그 작은 것을 앞으로 어떻게 보듬어줘야 할까. 곧 태어날 아이를 내 팔뚝에 얹어놓는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이제 아버지처럼 나도 그 아이를 이제 내 등 위에다 얹고 달려야 한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였을 아버지는 그 작은 것을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집집마다 저녁밥 짓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는 그 80년대의 마을길에서 아이를 팔뚝에 얹고 천천히 걸어가던 덩치 큰 한 남자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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