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차 새내기 기자가 꾸는 꿈

2012. 12. 14. 10:10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뭐니 뭐니 해도 바다는 늘 예상치보다 20%는 크니까. 마음으로 어지간히 크기를 그리고 가보아도, 그보다 20%는 항상 크다.” 일본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암리타>에 나오는 이 문장을 꽤 오래 전에 읽었다. 그리고 다시 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린다. 


바다가 늘 예상치보다 크듯, 삶 또한 늘 예상과 다르다. 합격 전화를 받는 장면을 여러 번 상상했다. 하지만 정작 그 순간, 덜컹거리는 전철 안에서 나는 여느 때보다도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그래요?”



▲수습기간이 끝나고 찍은 수습기자 교육 명찰과 수습기자라 적인 명함. 뒤편의 취재수첩 5권은 수습기간 동안 쓴 것이다.




이 한 마디를 내뱉을 만큼 쉽게 ‘취업뽀개기’를 한 편도 아니다. ‘생명과학’이란 전공과는 동떨어진 길을 준비하면서 때로는 흔들렸고, 외로웠고, 아팠다. 문턱에 주저앉아 눈물을 삼키던 날들 역시 많았다. 그럼에도 계속 주저앉아 있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왼쪽 안경 안 쓴 여자(좌측 사진), 왼쪽 수첩 들고 있는 여자(우측 사진)이 나다. 지금 봐도 머리가 부스스하다;; [사진-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좌), 오마이뉴스 조재현 기자(우)]




‘박소희’란 이름 뒤에 ‘기자’란 두 단어가 붙은 지난 8개월에서 그 답을 찾았다. 결국 모든 것은 예상치보다 20%는 달랐다. 트위터에 올린 글 때문에 해고당했던 20대 여성, 선배들이 자신의 입에 담배 20개비를 물려 불을 붙이고, 욕설과 구타 등을 일삼은 탓에 심한 원형 탈모를 앓던 젊은 양궁선수,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철탑에 매달려 농성 중인 노동자들, 여전히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수많은 약자들…. 흔히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말하지만, ‘아직 그대로’이거나 시대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입사 후 처음으로 출판사에서 받은 책 ‘의자놀이’




정반대로 ‘예상과 다르다’고 생각한 때도 많았다. ‘마을’이란 꿈을 함께 꾸며 현실로 만들어가는 사람들, ‘누가 더 센 징계를 받았나’는 이상한 경쟁을 하면서도 ‘공정하고 바른 언론’이란 꿈을 놓지 않는 해직언론인들, 시대의 야만을 온몸으로 감내했으나 그 아픔에 무릎 꿇지 않고 또 다른 시대의 야만에 저항하는 사람들…. ‘기자’라는 직업 덕분에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은 예상보다 ‘20%는’ 컸다. 언젠가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하지 못하고 엉엉 울던 날, 그때 주저앉아버렸다면 아마 나는 평생 ‘20% 작은 바다’만 꿈꾸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일을 하면서 ‘예상과 다른 20%’를 느낄 때 또한 종종 있다. ‘기자’에 앞서 ‘사람’이어서다. 몇 달 전 기초생활수급자 관련 기획을 진행했다. 1시간 남짓 취재원을 인터뷰하고 ‘부양의무자’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썼다. 검토(데스킹) 과정에서 재차 확인한 결과 취재원의 형편이 그를 만난 이유와 달랐다. 기사가 나가면 오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80년 광주를 경험했고, 정부가 조작한 간첩사건에 연루돼 오랜 옥살이를 했던 강용주 광주 트라우마센터 소장을 만났을 때는 너무 막막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 컴퓨터 화면에서 계속 깜박이는 커서를 한참 들여다봤다. 여느 때보다 힘들게 한 글자씩 써내려간 인터뷰는, 지금도 마음에 깊숙이 박혀있다.


언론진흥재단의 <다독다독>에 ‘새내기 기자로서 느낀 점, 입사하기까지의 일’ 등을 담은 글을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뭘 써야하나’ 고민이 많았다.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류의 합격수기를 쓰기엔 언론사 입사시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아니고, ‘나는 이런 기자다’란 글을 쓰기엔 경험이 너무 적어서였다. 


한참을 고민하다 ‘바다는 늘 예상치보다 20%는 다르다’는 문장을 다시 발견했다. 이 말에는, 여기에 언론사 입사를 준비했던 이유, 그 과정의 흔적들, 그리고 입사 후 현장에서 얻은 깨달음 등이 담겨있다. 앞으로도 계속 ‘예상과 다르구나’란 말을 입에 달고 살 듯 싶다. 다만 훗날 이 글을 다시 볼 때에는, ‘박소희 기자도 예상과 달랐네’란 말을 씁쓸하게 내뱉고 싶지 않다. 힘든 일이란 점은 알고 있지만, ‘빼도 박도 못하게’ <다독다독>을 빌어 기록을 남긴다. 


얼마 전, 또 다른 일본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한마디가 마음에 남았다. 그는 소설가 김중혁씨에게 “오래 전에 젊은 작가였기에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 나는 최고로 젊은 작가다. 현실에 맞서고 현실과 대면하는 작가는 젊은 작가다”라고 얘기했다. 여기서 ‘작가’를 ‘기자’로 바꿔 본다. 그리고 꿈꿔 본다. ‘현실에 맞서고, 대면하는 기자는 젊은 기자다. 지금 나는 최고로 젊은 기자다’란 말을 할 수 있는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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