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집에 책이 없는 이유

2011. 6. 14. 13:43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멋진 휴식시설, 도서관 같은 독일 서점

한국도 물론이지만 미국이나 독일, 영국 등 선진국의 낮은 독서율은 통계를 통해서도 곳곳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독일도 물론입니다. 특히 청소년이나 젊은 층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한여름 잔디공원이나 바닷가 휴양지에서 길게 누워 일광욕을 하면서 책 읽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휴가를 가면서도 반드시 책을 가져가더라고요. 그런 것으로 봐서 낮은 독서율과는 달리 생활 속에 독서가 자연스럽게 스며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마음만 있으면 돈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분위기입니다. 도서관 시설도 곳곳에 잘 되어 있지만 서점도 도대체 판매를 위한 곳인지 도서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독서를 위한 안락한 소파와 책상, 컴퓨터 게임까지 각종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지요. 하루 종일 서점에서 빈둥거리며 보내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으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환상적인 장소입니다. 그런데도 읽으려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문제지요.^^

도서관이나 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젊은 층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입니다. 특히 책방이나 도서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와서 책을 고르고 있는 아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바쁜 부모의 빈자리를 할머니 할아버지가 채워주는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통 독일 가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요.




독일 도서관은 아이들 놀이터


독일 가정에는 집안에 책이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독서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설이 훌륭한 도서관이 동네마다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큰아이가 세 살 때부터니 꼭 13년째입니다. 우리가 시립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뮌스터에서부터 였지요. 그 때는 독일에 막 와서 집에 아이를 위한 동화책도 한 권 없었고, 어려운 유학생 살림에 한꺼번에 많은 책을 사들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아 궁리하던 끝에 생각해낸 해결책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내가 아는 도서관은 공부만을 위한 곳이었습니다. 대학 졸업논문 때문에 남산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몇 권 빌렸던 기억이 나기는 하지만, ‘도서관 간다.’는 의미는 역시 ‘공부하러 간다.’였었지요. 독일에 올 즈음인 10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인식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곳에서 처음 도서관을 찾을 때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요. 그저 독일 동화책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어떤 것들이 나와 있는지 대충 훑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어린이 코너에 꾸며진 예쁜 공간이 방문 첫날부터 우리 아이를 신나게 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색연필과 도화지, 책상, 장난감, 놀이시설 등이 소박하지만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었고, 알록달록하고 예쁜 덮개를 씌운 소파와 카펫 위에 총천연색 방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요. 도서관이라면 딱딱한 책장에 빼곡하게 들어찬 책들과 질서정연하게 놓인 책상만 생각했던 내게 뮌스터 시립도서관은 많이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마음껏 뒹굴면서 책장을 넘길 수 있는 분위기가 아이와 책을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할 것 같아 마음에 쏙 들었지요. 당시 3살이던 큰아이는 처음엔 장난감과 놀이시설에만 정신이 팔려 좋아하더니, 차츰 익숙해지면서 책을 들추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다른 일을 하는 동안에도 스스로 놀고, 읽고 하니, 나를 위해서도 그 곳은 좋은 휴식공간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방문으로 아이에게 도서관은 놀이터가 되었지요. 게다가 이용증만 만들면 대출비도 무료니 책 살 돈조차 절약해야 했던 빠듯한 유학생 가족에게는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운 곳이었습니다.




도서관이 제 역할만 해도 생활비 절약할 수 있어


처음엔 책도 책이지만 그 곳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거의 매일 드나들었지요. 그 때마다 빌려오곤 했던 한두 권의 동화책이 차츰 독일어에 익숙해지면서 많아지게 되었고, 이제는 두 녀석과 다니다 보니 한 번에 20권이 넘게 대출해 오곤 합니다. 지금은 시내와 좀 떨어진 곳에 살기 때문에 거리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일 만큼은 잊지 않고 챙깁니다.

아이를 둘이나 키우지만 우리 집 책장에는 지금도 동화책이 몇 권 없습니다. 도서관만 열심히 다녔지요. 큰 아이는 돈들이지 않고도 엄청나게 많은 동화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어린이 코너에 꽂혀있는 책은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을 것입니다.

읽기 위한 책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필요한 참고서와 문제집도 모두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고 있습니다. 큰아이가 12학년까지 다니는 동안 아주 중요한 참고서 한두 권 산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빌려서 공부했지요. 사교육비도 한 푼 들이지 않으면서 책까지 빌려 쓰니 아이들을 너무 공짜로 키우는 것 같아 은근히 미안한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작은 아이도 아기 때부터 따라다니다 보니 이제 책을 보는 안목도 제법 늘었습니다. 처음엔 도서관이 놀이터라고만 생각하고 따라와서 신나게 놀기만 하더니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라고요.

좋은 책을 선별해서 골라주던 큰아이 때와는 달리 작은 아이는 스스로 선택하게 합니다. 이제 독일 분위기에 제법 익숙해진 때문인지 작은 아이는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를 내세우며 될 수 있으면 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스스로 책을 고르는 일은 표지에 ‘1학년용, 2학년용’으로 수준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이 녀석이 1학년 때는 표지 그림을 보고 재미있어 보이는 1학년용 동화책을 고르더니, 2학년이 되면서 머리를 쓰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용도 들춰보더라고요. 책장을 뒤적이며 고르는 모습을 슬쩍 훔쳐보고는 제법이라는 생각에 어찌나 뿌듯하던지. 그런데 알고 보니 내용을 읽은 것이 아니라, 글씨가 얼마나 많은가 따져 본 것이었습니다. 글이 너무 꽉 찬 책은 읽기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그래, 그것도 익숙해져 가는 과정이니 맘대로 하라’며 내버려 두었지요.




도서관이 사람을 찾아가는 이동도서관


도서관은 또 찾아오는 사람들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약간 거리가 먼 곳은 버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를 방문해서 이동도서관을 열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는 날은 굳이 시내로 나가지 않아도 책을 반납하고 빌리는 일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요긴한 시립도서관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써야 했을까? 가끔 생각해 보면 횡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도서관이 제 역할만 해도 많은 사람이 적지 않은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독일에서 새삼 알게 되었지요.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한국도 요즘 시립이나 국립도서관이 활성화되고 있어 이용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예전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형 서점은 예전부터 이미 독서공간을 제공해 주는 서비스 정도는 했었지요. 우리도 이제 제도와 시설은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은 것은 독일처럼 일반인들의 생활 속에 얼마나 익숙하게 자리 잡을 것인가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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