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기 - 절도범에 의해 다시 한국으로 넘어온 관세음보살좌상

2013. 5. 31. 14:44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절도범들이 일본에 있는 우리나라 불상을 훔쳐서 가져오다 딱 걸렸데”, “애국자네, 그런데 가짜(복제품) 아냐?”



일본 대마도에서 불상을 훔쳐 바다를 건너오다 세관에서 적발된 절도범들이 경찰에 검거됐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대화가 오갔다.


경찰은 도망간 일부 절도범들을 잡기 위해 기자단에 엠바고(일시적 보도 제한)를 요청했고 보름여 동안 이 사건은 ‘그냥 절도범이 불상을 훔쳐오다 경찰에 적발됐다’ 정도로만 기억됐다.



<절도범에 의해 되돌아온 동조여래입상(왼쪽)과 관세음보살좌상(오른쪽)>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문화재청 관계자가 동석한 경찰 브리핑 자리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취재를 위해 참석했다.


경찰의 절도범 검거와 사건 경위 등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됐고 경찰은 절도범들이 훔쳐온 동조여래입상과 관세음보살좌상, 이 불상 2점이 진품이고 각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는 설명을 했다.


그귀가 솔깃했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진짜라니, 게다가 우리나라 것이라니.


문화재청 관계자가 브리핑장 단상에 섰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 관계자가 절도범이 일본에서 훔쳐온 거지만, 원래 우리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다시 되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이 관계자는 불상이 장물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일본에 돌려줘야 한다는 설명을 했다.



<동조여래입상>


그리고 유네스코 협약을 그 이유로 들었다.


협약에는 유네스코 가입국인 일본이 불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합당한 증거가 확인되면 역시 같은 가입국인 우리나라가 불상을 일본에 넘겨줘야 한다고 돼 있다.


특히 이 관계자는 "절도범들이 불상을 훔친 장소인 대마도가 우리나라와 가까운 거리에 있고 과거 일본과 우리나라가 불교적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불법성을 특정하기는 어렵다”며 “임진왜란 등 왜구들의 침략으로 불상이 일본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나 근거를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리 장물이라지만, 그래도 원래 우리 것이었는데 무조건 돌려줘야 한다니. 왜?
설명을 듣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고 머릿속에서 ‘왜?’라는 한 글자가 맴돌았다.
궁금한 게 많았고 브리핑에 참석한 다른 기자들이 눈치를 줄 만큼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무조건 돌려줘야 한다'였다.

평소 한·일 관계 등에 관심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도 문제가 한창 이슈화되고 있을 당시였기 때문에 잘난(?) 애국심이 발동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관세음보살좌상>


찝찝한 기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타부서 선배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정보를 들었다.
불상들이 최초로 만들어졌던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근무했던 스님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옳다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연락을 취해 스님을 만났다.
브리핑 당시 문화재청 관계자에게 다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이 스님은 절도범들이 훔쳐온 불상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도중 스님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털어놨다.
2점의 불상 가운데 적어도 관세음보살좌상은 일본에 넘겨주지 않아도 될 만한 증거가 있다고 했다.


10년 전 관세음보살좌상이 일본에 보관돼 있을 당시 대마도 관음사 주지스님이 부석사를 방문했고 이 스님은 "불상 안을 들여다봤는데 그 안에 각종 복장물(오곡·오학·직물·복장기)이 들어있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기사의 초점은 관세음보살좌상의 복장물로 맞춰졌다.


<부석사에 있었던 스님을 시작으로 학계, 불교계의 증언이 이어졌다.>



불교에서 복장물은 불상 제작에 주요 증거가 된다.
관세음보살좌상이 만들어졌던 고려시대에 불교를 일본에 전파하기 위해 불상을 넘겨줬다면 몸 안의 복장물을 비우거나 새롭게 만든 불상을 만들어주는 것이 불교계의 관례다.


하지만 관세음보살좌상처럼 복장물이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당시 일본에 선물을 하기 위해 불상을 넘겨준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일본이 약탈해갔다는 것이다.

팩트를 확인하기 위한 더 많은 증거가 필요했지만, 모자란 시간과 잘난 애국심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축구 등 스포츠 경기를 하면 중계진은 우리나라 편에서 중계하고 국민들은 그 중계를 보고 들으며 분노하고 기뻐하지 않는가.


한창 독도 문제가 이슈가 됐기 때문에 더욱 그런생각이 앞선던 것 같다.


데스크에 스님을 만난 사실을 보고했고 추가 취재를 통해 기사의 충실도를 최대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데스크는 지면을 활짝 열어줬다. 브리핑 이후 관세음보살좌상의 복장물에 관한 첫 보도가 지면에 실렸다.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언론 등 여론은 ‘돌려주느냐 마느냐’에서 ‘돌려주지 말자’로 흘러가고 있었고 문화재청 관계자는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보도 이후 여론은 ‘돌려주느냐 마느냐’에서 ‘돌려주지 말자’로 흘러갔다.>



복장물에 관한 보도 이후 돌려주지 말아야 할 더 많은 증거를 찾는 노력이 필요했다.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문화재연구원과 학계 사람들, 불교계를 두루 접촉해 증거를 최대한 수집했다.
감사하게도(?) 증거는 곳곳에서 포착됐다.


불상이 봉안됐던 서산 부석사의 또 다른 국보급 불상이 관세음보살좌상이 보관됐던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아직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기사를 작성함에 있어 이 사실 또한 관세음보살좌상을 돌려주지 말아야 할 증거로 판단했다.


또 이미 17년 전 서산 부석사에서 관세음보살좌상을 돌려줄 것을 일본 측에 요청한 사실과 이 불상이 과거 14세기, 왜구에 의해 일본에 약탈된 것이라는 일본인이 작성한 논문을 입수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보도가 이어지는 동안 문화재청은 애초의 '돌려줘야 한다'는 입장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일부분 바꿨다.


이후 전국 시민단체와 불교계, 정치권은 잇따라 성명을 냈고 문화재청은 관세음보살좌상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넘어간 것이 맞는지와 그 시기, 배경 등에 대한 학술연구 추진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산 부석사 스님들은 불상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일본 대마도로 향했다가 그곳 스님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잘난 애국심에서 시작한 관세음보살좌상에 관한 보도는 어느덧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향해 달려갔다. 중간중간 위기도 있었지만, 보도는 모두 16차례에 걸쳐 이뤄졌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다. 65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관세음보살좌상은 현재 회수 여론 속에 문화재청에 보관 중이다.


앞으로 이 불상이 최초 문화재청 관계자의 설명대로 유네스코 협약에 따라 일본으로 넘어가게 될지 아니면 고국의 품 안에서 머물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관세음보살좌상이 가장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은 타국인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라는 점이다.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3년 5월호 충청투데이 고형석 기자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