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7. 09:3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전설의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는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를 글자 그대로 물리적 거리 좁히기로 받아들이기엔 아쉽다. 모자이크 기법으로 완성된 작품이나, 산의 형세처럼 때론 멀어져야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잘 보기 위해 필요한 건 대상과 나의 적정한 거리다. 스무해 남짓 살았던 땅을 떠나고서야 나는 그곳과 가까워졌다.
시간은 있지만 시계는 없다
나는 과수원집 딸이다. 부모는 헌법 위에 자연법이 있다 믿었고, 자연의 시계에 맞춰 생을 경작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해 뜨는 시간이 달라졌고 부모의 노동시간도 유연하게 바뀌었다. 그에 맞춰 나의 기상 및 취침시간이 정해졌다. 자연의 리듬와 생체 리듬이 조화를 이루면 그 뿐 시, 분, 초를 명확히 알려주는 시계는 없어도 그만이었다. 유년기를 보내고 학교에 입학하자 나는 시계가 필요해졌다. 등하교 시간을 맞추고, 수업시간을 알며, 쉬는 시간을 지켜야 했다. 8시, 50분, 10분 등 수치상으론 딱딱 떨어졌지만 몸엔 잘 새겨지지 않는 리듬이었다. 대신 학교에서는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줬다.
농부만 찾아내는 ‘전원일기’ 옥의 티
동네에선 농부 아닌 사람이 드물었고, TV에선 ‘농부’가 드물었다. 전원일기는 그래서 반가웠다. 감상법은 제각각이었다. 엄마는 스토리에 빠져들었고, 아빠는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드라마가 종영한 지 10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옥의 티’가 있다. 들에서 일을 마친 농부가 집에 와서 삽을 씻는 장면. 내 보기엔 아무렇지 않은데 수십 년차 농부는 납득하지 못했다. 아빠는 “들에는 물이 없냐? 누가 흙 묻은 삽을 집까지 가져와서 씻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묵한 아빠가 많은 말을 쏟아낸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에도 ‘전원일기’는 아빠의 말문을 틔게 했다.
반장의 품격, 농민신문 구독
1990년대 초반 나와 아빠가 동시에 ‘반장’에 당선된 해의 일이다. 나의 품위유지는 시계로 충분했고, 아빠는 ‘농민신문’의 구독이었다. 이후 어쩌다 한 번씩 보는 우체부를 날마다 보게 됐다. 나는 신문 정기구독이 어쩐지 도시인의 생활처럼 여겨져 마냥 기뻤다. 유명한 신문이든 아니든 논조가 어떻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신문을 구독한다는 사실만으로 설렜다. 그 시절 교과서에 등장하는 착한 어린이는 아빠 구두를 닦고 용돈을 벌었지만 나는 닦을 구두가 없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며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을 하는 아빠도 모두 남 얘기였다. (사실 장화를 닦고 손을 내미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거 같다. 양복과 과수원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그런 내게 ‘신문 읽는 아빠’는 목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반듯하게 펴지는 일대 사건이었다.
막걸리와 신문지, ‘환상의 짝궁‘
반장 임기는 1년이었다. 아빠의 ‘농민신문’ 구독은 그보다 좀 더 길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겼다. 그 기간 동안 아빠가 신문을 정독한 날은 사실 며칠 되지 않았다. 농번기엔 말 그대로 바빴고, 농한기엔 그대로 또 바쁜 일이 생겼다. 구독자 사정이야 어쨌든 신문은 꼬박꼬박 배달됐다. 집에 쌓인 신문은 밥보자기 대용, 그릇 깨짐 방지용, 장마철 습기 제거용 등 여러 모로 쓰였다. 과수원에서도 유용했다. 신문지를 차르륵 펼치면 각자 일하던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신문지는 밥상 또는 술상을 만들었고, 방석으로도 기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문지 식탁에 막걸리가 올라오고 농부들은 목을 축였다. 나무 그늘에 신문지 쉼터, 환상의 조합이었다. 휴식이 끝나고 척척척, 신문지가 접히면 다시 일할 시간이었다.
고향집을 떠나 도시민이 된 지 10년. 자연과 제법 멀어졌지만 그 리듬에 맞춰진 시계는 여전히 움직인다. 특히 해가 중천에 뜨건 말건 늘어지게 자도 되는 날, 야속한 몸은 주인의 바람을 배신하고 눈을 뜨는 것으로 촌민의 정체성이 지워지지 않음을 입증한다. 별 수 없이 눈을 뜨면 나는 그날 아침 배달된 신문을 펼치는 것으로 휴일 기분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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