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랭지’ 아는 초등 1학년 아이, 그 비결 살펴보니

2013. 8. 20. 10:27다독다독, 다시보기/생활백과






“그런데 동환이는 책을 많이 읽나 봐요? 1학년짜리가 ‘고랭지’라는 단어는 어떻게 알아? 그러고 보니 동환이가 좀 고급스러운 단어들을 많이 쓰는 것 같아. 호호호. 우리 아들이 그 말을 듣더니 자기는 고릴라는 들어 봤어도 고랭지라는 단어는 처음 듣는다며… 호호호.”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엄마가 까르르 웃으며 내게 묻는다.

“그래요? 동환이가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다고는 할 수 없는데…. 뉴스에서 들었나 보죠. 호호호.” 

직장을 다니는 엄마는 아이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가끔 시간을 내어 학부모 모임에라도 나갈라치면 단단하게 정신을 무장하는 일이 먼저다.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사교육에 관한 정보가 오간다. 거창하게 말해 사교육에 관한 정보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대한 사교육의 물길 속에 휩쓸려 아이들이 익사하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교육열이 얼마나 뜨거운지에 대해 더 뜨거워진 얼굴로 수다를 떠는 것이다. 아무리 심지 굳은 엄마라도 모임에 다녀오면 자신의 교육관이 살짝 흔들리기 마련이다. 나 또한 나만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나간 학부모 모임에서 뜻하지 않은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와 동환이에게 “너 고랭지라는 말은 어디서 들어 봤니?”라고 하자 한참 기억을 더듬던 동환이는 “예전에 신문에서 본 것 같아. 말이 좀 웃겨서 무슨 뜻인지 읽어 봤거든. 고랑내도 아니고 고랭지라니…. 웃기잖아?”





기업에서 강의를 하는 나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좀 민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업 조직원들의 연령 차가 다양하니 20대 초반 젊은이들의 유머에서부터 임원급의 경제 용어들은 물론 세상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 내 강의 자료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침마다 신문을 챙겨 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을 나서기 전까지는 어엿한 엄마이기 때문에 늘 시간에 쫓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정보비서로 임명한 것. 정보비서가 하는 일은 아침에 엄마가 신문에 빨간 색연필로 그려 놓은 구획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다. 가위로 잘라 낸 위쪽 여백에는 날짜와 신문의 이름 써 놓아야 한다. 예전 아날로그 시대의 신문 스크랩하는 방법 바로 그것이었다. 


신문을 펼쳐 놓고 헤드라인을 먼저 본다. 딱 감이 온다. 이건 좀 더 자세히 읽어 봐야겠는걸? 그런 다음 빨간 색연필로 기사의 테두리에 선을 긋는다. 기사가 잘리지 않도록 정확하게 구획을 그려 줘야 아이가 실수하지 않고 온전하게 기사를 잘라 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살짝 욕심이 생겼다. ‘이건, 동환이가 알아 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조금 어려운가?’ 걱정도 생겼지만 일단 빨간 색연필로 체크해 놓았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아들이 스크랩해 놓은 신문 조각들을 들고 뛰어온다. 

“엄마 오늘 스크랩은 총 12개예요. 그럼 수고비는 120원이네?”라고 하며 자신의 장부(?)에 오늘의 일당을 적어 놓는다. 이렇게 잘라 놓은 자료를 2주에 한 번 정도 펼쳐 놓고 선별 작업을 한다. 그럴 땐 꼭 아들을 옆에 앉혀 놓는다. 나는 의도 100%이지만 아이에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동환아! 이건 날짜가 며칠이라고 적은 거니?”라고 물으면 자신이 모아 놓은 자료들이 뿌듯한지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내 옆에 앉아 미주알고주알 그 시간으로 돌아가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한다. 


“엄마 이거 오릴 때는 엄마가 그려 놓은 선 바깥으로도 글이 있어서 좀 헷갈렸어.” 

“엄마, 이거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구.” 

“엄마, 이 기사에 나온 아이는 너무 안됐어.”

“엄마,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전쟁을 할까?”


오∼ 빙고! 나의 의도 적중이다. 강제로 읽어 보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아이는 신문의 기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기사를 읽고 자신의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이와 나는 제법 다양한 관심사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현관 밖 신문과 우유를 들고 들어오는 일은 아이의 차지가 되었다. 6학년이 된 아이는 아직 바깥세상 구경 한 번 하지 못했지만, 매일 아침마다 신문을 통해 짧은 해외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은 좁지만, 머리를 들어 바라봐야 할 세상은 넓다는 것. 아이의 키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매일매일 자라듯 아이의 꿈도 매일매일 자랄 수 있게 해 주는 신문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꿈의 영양제가 아닐까?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2013년 신문논술대회 수상작> 중 학부모부 금상 이수정 님의 '뭘 먹여 키를 키우지? 뭘 먹여 꿈을 키우지?'를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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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문논술대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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