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도 쉬지 못하는 ‘기자’라는 이름의 사람들

2013. 9. 16. 19:55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벌써 4년 전 일이 됐다. 2009년 5월23일. 그 날은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도 부족했던지 아침 7시에 해장술에 국밥 한 그릇까지 비운 뒤 집에 들어왔다. 토요일이라 쉰다는 생각에 부담 없이 술을 들이켰던 것 같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침대에 구겨져 잠들어 있는데 희미한 전화 진동 소리가 들렸다. 아침 9~10시 정도였던 것 같다. 잠결에 전화가 왔는지 안 왔는지도 인식을 못하다가 무심결에 폴더를 열었다. 회사 사건팀 바이스(부팀장) 선배였다.





선배는 대뜸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으니 얼른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잠결에 나는 “에이, 선배 거짓말 하지 마세요” 하면서 장난처럼 되받았다. 단언컨대, 진짜, 거짓말인 줄 알았다. 가끔 후배들을 골려 주려고 큰 사건이 터졌다고 거짓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건팀은 사건이 터지면 언제 어느 시간이든 달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듭되는 선배의 말을 듣자 조금씩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진짜 사실일까. 차츰 정신이 들어 생각해보니 토요일 아침 이 시간에 선배가 괜히 전화를 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장난이 아니었다. 숙취에다 잠이 덜 깨 얼얼한 정신을 부여잡고 대충 씻은 뒤 회사로 나가보니 호외 발행이 결정됐다고 했다. 갑작스런 호외 발행 준비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인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얼떨결에 나는 봉하마을 취재진에 합류하기로 결정됐다. 급히 나오느라 세면도구나 옷가지는커녕 속옷 한 장 챙겨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대로 회사 차량에 몸을 실었다. 김해까지는 5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술도 덜 깨서 머리는 아픈데, 계속 차를 타고 가려니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거의 구토 직전까지 갔다. 같이 가던 선배 중 한 명 또한 과음했는지, 급기야 휴게소에 들러서는 구토를 하고 말았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쪽잠에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다가 겨우 막 저녁 무렵에 들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현장은 주민들을 비롯해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인파로 북적였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현직 대통령과 한 전직 대통령의 조화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나서서 밟아 뭉개 버릴 정도였다. 더구나 기자들은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 그야말로 ‘공공의 적’ 이었다. 특정 언론사를 가릴 것도 없었다. 취재하는 기자들을 보고는 “너희들의 기자정신이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쪽에서 기자단이 취재하고 기사를 전송할 수 있는 천막을 만들어 주었지만, 곧 몰려든 인파들이 천막을 둘러싸고 나가라고 윽박질렀다. 결국 천막이 거의 부서질 지경이 돼 일단 노트북만 들고 종종 걸음을 치며 철수했다.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 일한다는 생각은 들 틈이 없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아수라장으로 직행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취재를 하고 회사에 보고했는지,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가물가물했다. 2~3일이 지나서야 겨우 조금은 정신을 차렸다. 같이 서울에서 온 선배들은 일부 복귀했지만 나는 지시를 받고 영결식 날까지 봉하마을에 남게 됐다. 4~5일이 지나자 무더운 날씨 탓에 갈아입지 못한 옷은 땀범벅이 돼 쉰내가 진동했다. 스스로가 땀 냄새 때문에 질식할 정도였다. 그래도 옷을 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느 날 빈소 주변을 돌며 취재를 하고 있던 나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조문객들에게 국화꽃을 나눠주고 있던 아주머니였다. “아무리 기자라도 그렇지, 상중에 빨간 옷이 뭡니까?” 아주머니의 면박을 들은 나는 문득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자주색과 흰색이 번갈아 염색된 티셔츠였다. 며칠 동안 있으면서도 내 옷 색깔이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주 무례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장례식 복장으로 적절치 못한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겨우 시간을 내서 진영읍내를 나가 아래, 위 각각 만원씩 주고 검은색 여름 등산복 1벌을 샀다.





예정대로라면 편안하게 늦잠을 자며 쉬었을 토요일 아침, 정신없는 상황에서 시작된 취재는 그야말로 꼬박 일주일을 갔다. 돌이켜 보면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천안함 사건도 금요일 밤에 일어났다. 그날 나는 사건이 일어난 줄도 까맣게 모르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새벽 즈음이 돼서야 술자리의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 듣고 “해군 함정이 침몰했다는데” 하는 얘기를 꺼냈다. 사고 원인은 무엇일까, 북한의 소행일까,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병사들의 죽음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하는, 술자리답지 않은 자못 진지한 얘기들이 오갔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이 나와 연관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음 날인 토요일 아침에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백령도로 좀 가야겠다.” 술이 덜 깬 채로 아픈 속을 부여잡고 막 해장하기 위해 짬뽕 한 젓가락을 입에 넣으려던 찰나였다. 봉하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엔 한 일주일 정도 지낼 수 있도록 짐을 단단히 싸 갔지만 허사였다. 그로부터 나는 꼬박 2주 동안을 백령도에 머물러야 했다.


모든 기자들이 휴무 때도 정신을 곤두세워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기자들은 큰 사건이 터지면 혹시 그 사건에 연관된 취재 지시가 내려오지는 않을지 본능적으로 불안해한다. 특히 사건, 사고 취재를 맡고 있는 기자들은 세상만사에 더듬이를 세우고 있다. 언제나 전화 한 통이면 현장으로 달려 나가서 사실 확인에 매달려야 할지도 모르기에 퇴근 후나 휴무 날에도 편히 쉬지 못한다. 기자 일이 다른 일에 비해 얼마나 힘든지 계량적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더 힘들다. 그건 바로 일이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추석 연휴 때도 사정은 비슷하다. 연휴 기간에 신문 발행은 쉬지만, 연휴 첫날 신문을 만들기 위해 전날 밤까지 고생하는 기자들과 제작, 인쇄를 맡은 직원들이 있다. 또 연휴 마지막 날에는 다음날 아침 배달될 신문을 만들기 위해 많은 기자들과 제작, 인쇄 담당 직원들이 출근을 해야 한다. 아마 연휴 기간을 오롯이 쉬어 보는 것이 소원인 기자들이 많을 것이다. 




[출처] 서울신문

요즘에는 온라인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 기사를 내보내야 하는 기자들은 그나마 연휴에도 편히 쉬지 못한다. 신문 발행과는 달리 인터넷은 24시간 기사 전송이 가능하다. 기사는 실시간으로 소비된다. 귀성이다 귀경이다 해서 이동에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는 연휴 기간 때는 더 그럴 것이다. 이제 점점 인터넷 환경으로 기사 생산과 소비가 옮겨가면서 기자들은 더더욱 더 못 쉴 것이다. 물론 기자들만 연휴에 일하는 건 아니다. 연휴는 그저 남의 일처럼 여기고 일터로 나서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득 뒤돌아봤을 때 그런 분들이 보이면 한 번쯤 격려의 말씀이라도 전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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