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10. 10:37ㆍ다독다독, 다시보기/현장소식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가수 윤복희는 이전에 볼 수 없던 ‘미니스커트’를 입고 등장합니다. 이 미니스커트는 전국을 발칵 뒤집어놓음과 동시에 유행의 아이콘이 되었는데요. 당시 언론은 ‘남들이 입는다고 나도 입으면 그야말로 민족 반역자’, ‘미니에 속지 말자’ 등 강경한 제목으로 비판을 했고, 급기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은 ‘25일 구류 처분’을 받기에 이릅니다. 지금으로선 상식 밖의 일이지만, 당시에는 오랜 관습을 뒤흔든 ‘센세이션’ 그 자체였는데요.
▲ 영화 <노라노> 티저 캡쳐와 ‘오드리햅번 스타일’의 배우 엄앵란
뿐만 아니라 <커피 한 잔>으로 유명한 펄 시스터즈의 ‘판탈롱’과 엄앵란의 ‘오드리헵번 스타일’, 최은희, 김지미, 문희 등 당시 여배우의 영화 의상 또한 당대의 대세였습니다. 이 모든 게 한 사람이 만든 신드롬이란 게 믿어지시나요? 바로 한국 디자이너 ‘노라노’의 손길이 닿은 의상 때문이었는데요.
현재 종로구 신문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Nora Noh : 자료로 보는 노라노발(發) 기성복 패션의 역사> 특별 기획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노라노’의 행보에 발맞춰 한국 근현대 의생활 문화 및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뜻 깊은 전시회였는데요. 자, 그럼 함께 둘러보실까요? ^^
많은 ‘최초’ 타이틀 가진 디자이너 노라노
‘노라노’는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1956년에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했으며, 70년대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기성복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또 1974년에 국내 브랜드 최초로 미국 메이시스 (Macy’s) 백화점 1층에 입점하는 등 한국 패션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녀의 팻숀쇼는... 예술의 서울, 세계의 서울, 외교의 서울로써 알려진 「파리」의 향수를 짙게 풍겨주고 있었다.
노라노 하계 패션쇼 평 中, 1957-06-13 조선일보 4면
그녀가 49년부터 운영한 명동의 의상실 ‘노라노의 집’의 옷은 감각적인 디자인과 뛰어난 품질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2012년 개최된 노라노 60주년 기념전 ‘라비 앙 로즈 La Vie en Roase展’에는 전시를 위해 주요 단골이 선뜻 기증한 옷도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골들은 노라노의 옷을 옷장에 곱게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옷’이었는지 짐작이 가네요.
15년여 간 축적한 데이터…‘기성복’ 탄생으로
예쁜 옷이 가득한 옷 가게로 들어간 모습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원하는 디자인의 옷을 고른 뒤 ‘사이즈’를 말하고 계산을 하면 쇼핑은 끝이 납니다. 옷 구매에 있어 절대적인 ‘치수’라는 개념. 과연 처음부터 있었던 걸까요?
노라노는 맞춤복 디자인을 한 15년 동안 고객들의 신체사이즈 통계를 냈습니다. 특정 기준에 의해 분리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녀는 의상을 미리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사이즈에 따라 옷을 마음껏 입어보았고, 저렴한 가격에 구매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기성복’이었는데요.
노라노의 기성복은 여대생과 여성 직장인이 늘어나던 60년대 시대상과 맞물렸습니다. 활동하기 다소 불편한 한복 대신 일종의 ‘작업복’이 필요한 거였죠. 사회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를 정확히 포착한 노라노의 기성복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기성복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사이즈. (노라노는) 20년의 주문복 디자이너 생활에서 사이즈의 자료를 이미 얻었다. 32, 24, 36, 38, 소. 중, 대로 나뉘는 사이즈는 어떤 손님이라도 자기의 사이즈를 찾아 입으면 딱 맞을 만큼 정확하다.
1966-09-03, 경향신문
기성복은 대량 생산과 섬유산업의 발전으로도 이어졌습니다. 그 당시 정부가 장려하던 정책에 힘입은 결과였는데요. 70년대 중반 노라노는 파리의 프레타포르테 쇼와 뉴욕 바이어들을 대상으로 한 뉴욕 실크 패션쇼 등에 참여하게 됩니다. 패션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당시 우리나라로썬 꽤나 의미 있는 일이었죠. 이를 계기로 70년대 중반 미국 뉴욕의 주요 백화점에 입점하는 등 기성복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기성복의 등장은 한국 패션사의 획기적인 기점이 되었고. 소비주체로서 여성 대중의 역할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한국 제품이 해외 시장에서 가지는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모더니스트 노라노…패션의 ‘확성기’ 되다
보통 디자이너의 손에는 실과 바늘, 드로잉 도구가 제일 많이 들려있을 텐데요. 노라노는 때때로 펜촉을 들기도 했습니다. 1957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15부작 칼럼 ‘생활미의 창조’와 1973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의상야화’ 시리즈가 바로 그것인데요. 그녀는 양장, 구두, 악세사리, 향수, 걸음걸이, 유행, 넥타이와 스카프, 바스트 라인의 미 등 서양식 의생활 교양과 매너 등 패션 지식을 소개했습니다.
(중략) ‘데자인’은 어디까지나 옷을 입는 분의 개성이라든지... 개성과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얼굴의 생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좀 여담 같으나 요즈음 젊은 여성들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경향으로써 손톱을 길게 기르고 빨갛게 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략) 손톱도 선의 하나로써 이것을 아름답게 꾸미는 노력은 결코 헛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노라노 연재기사 <生活美의 創造 (5) : 양장과 선>, 1957-09-26, 조선일보
또한 옷 제작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등 다방면의 주제를 폭 넓게 다루었는데요. 노라노는 유학 생활과 전문 직업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대 여성에게 서구식 복식문화와 패션에 관한 사고를 전달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양옷을 보는데 익숙지 않아 빠리에서 유행하던 뒤에 단추가 달린 옷을 입고 길에 나간 배우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얼떨결에 등 뒤로 돌아가 인사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노라노 연재기사 <衣裳夜話> 中, 1973-11-30, 한국일보 6면
노라노는 대중에게 생소했던 패션의 세계적 흐름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동 ‧ 서양의 전통적 문화간 차이, 서양식 매너에 대한 이해, 우리나라 여성의 몸, 의복 문화의 차별성과 장점, 패션과 산업 간의 연계성 등 다채로운 주제를 설득력 있게 기고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단순히 서구식 풍토만 전달하지 않고 소비와 문화의 주체인 대중의 역할을 인식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 사회와 문화적 상황에 적합한 양식을 만들어내려는 흔적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직업적 고민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토플리스가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을 더 망측스럽게 생각한 것은 동서양 어느 쪽이었을까? 재미삼아 한 번쯤 생각해볼만한 토픽이다. 동서양의 고객들과 함께 20여년을 지내온 나의 경험에 의하면 더 놀란 쪽은 서양인들이었을 것이다. 왠지 모르지만 서양인들은 여자의 가슴을 보면 놀라고, 동양인들은 여자의 다리나 맨발을 보면 놀란다. (후략)
노라노 <토플리스와 시드루>, 1973-12-05 한국일보
60년 동안 실과 바늘을 놓지 않은 상처 난 손이 아름답게 느껴지던 노라노. 옷과 함께 스스로 인생을 디자인해온 개인의 삶과 멋스러운 의상들, 근현대 패션사, 세대 간의 소통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도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노력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응원을 보냅니다. 파이팅!
2013년 기획전 Nora Noh : 자료로 보는 노라노발(發) 기성복 패션의 역사
전시기간: 2013년 10월 30일 – 12월 15일
전시장소: 신문박물관 기획전시실 (화-일 10am-6pm, 월요일 휴관)
관람료: 일반 3,000원 / 청소년 2,000원 (상설전 관람료 포함)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 작품 및 예매 정보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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