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9. 10:39ㆍ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배웠다 하는 관리들이 밤새 하는 짓거리라니….”
조선 정조 11년인 1787년의 일입니다. 예문관에서 숙직을 하던 김조순과 이상황은 <평산냉연>이라는 소설을 읽다가 정조에게 발각돼 곤욕을 치릅니다. 이 책은 평·산·냉·연이라는 네 명의 꽃미남과 꽃미녀들이 등장하는 청나라의 유명한 연애소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숙직을 서던 관리들이 로맨스 소설을 탐독했다는 얘깁니다.
지금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니었겠지만 당시 정조는 불같이 화를 냈던 모양입니다. 그 책들을 다 불태워 버리도록 명하고 다시는 그런 ‘잡서’를 보지 말도록 지시했다는데요. 바로 ‘문체반정’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개혁군주’ ‘계몽군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정조가 왜 선비들이 어떤 책을 읽느냐를 가지고 못살게 굴었을까요? 오히려 문화의 융성을 위해서는 다양성을 존중해줘야 하지 않았을까요?
문체반정의 ‘반정’이란 “바른 것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정조에게 있어 바른 문체란 <논어> <맹자> 같은 고전에서 쓰이는 딱딱하고 반듯하고 형식을 갖춘 글이었습니다. 정조는 누구보다 완고한 주자학자였다고 합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문장론은 ‘도본문말(道本文末)’로 요약됩니다. 그러니까 글(문)을 쓰는 이유가 오직 도, 즉 옳고 바른 길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는 것인데요. 그런 입장에서 보면 로맨스 소설뿐만 아니라 소설문체 자체가 아주 문제투성이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꾸며서 만든 이야기인데다 그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재미있게 전달하는데 치중하는 글이니까요.
[출처 - 교보문고]
그렇다고 해도 사실 우리네 눈에는 ‘문체’가 뭐 별건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문체란 “문장의 개성적 특색. 시대, 문장의 종류, 글쓴이에 따라 그 특성이 문장의 전체 또는 부분에 드러난다”고 돼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글투’, 그러니까 말의 특징을 일컫는 ‘말투’처럼 글의 특징을 일컫는 말인데요. 그깟 글투를 통제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는 것일까요. 정조의 문체반정에 몇 번이고 ‘개긴’ 이옥이라는 유생의 이야기를 담은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북드라망)를 살펴봅시다.
문체는 단순히 형식적인 수사학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에서 읽고 쓴다는 것은 옛글에 담긴 전통과 지배적 담론을 몸으로 익히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의미했다. (...) 예컨대 무엇이 진리인가를 따지는 글은 어떤 진리가 있다는 건 인정하는 꼴이다. 그런데 이 담론 바깥에서 이뤄지는 진리 찾기와 무관한 담론들은 진리 자체의 존재를 의문시하고 나아가 그 담론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 “어떻게 쓰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무엇을 쓸 것이냐는 관점의 문제”이며 “새로운 사상은 언제나 새로운 글쓰기를 싣고” 온다.
[경향신문 2013-05-25] ‘정조의 문체’를 거역한, 글쓰기의 자유인 ‘이옥’
예컨대 이옥은 이런 얘기를 소개합니다. 어떤 아전이 원님의 명을 받고 제수용품을 사러 갔는데 품목 중에 ‘법유(法油)’라는 게 도통 뭔지 모르겠더랍니다. 기름장수도 참기름, 들기름은 알아도 그런 기름은 처음 들어봤다고 하고요.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그게 등잔기름이었다는 겁니다. 비슷한 얘기를 또 해 봅시다. 어느 날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환자분, 부주의하게 스포일드 푸드(spoiled food)를 먹어서 다이어리어(diarrhea)가 생겼군요. 창구에서 앱스트런트(obstruent) 받아가세요.” 물론 영어를 잘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다이어리어가 ‘설사’, 앱스트런트가 ‘설사약’이란 걸 모르는 사람들은 도통 뭔 소린지 알 수 없을 겁니다. 역시 문체반정을 다룬 책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보리)에 나오는 얘깁니다.
[출처 - 교보문고]
배운 자, 가진 자만이 쓰고 해독할 수 있는 문체는 권력이고, 이는 곧 불평등과 차별을 낳는다. 문체를 민중에게 돌려준 빅토르 위고, 루쉰,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이 혁명을 불러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문체를 바꾸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 일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의미에서 문체반정을 해 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경향신문 2012-10-20] 정조가 문체를 바꾼 이유는 무얼까
왜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전문용어를 쓸까요? 왜 조선시대에는 한문을 아는 양반만이 귀족이 되고 지배층이 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언어란 무서운 무기입니다. 언어의 차이가 바로 권력을 낳습니다. 그런 문체를 쓰는 사람, 그런 언어로 소통 가능한 사람들은 힘을 가지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못 배운 서민들은 늘 그들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간단한 설사약조차 엄청나게 귀한 약인 줄 알고 받아먹게 되는 것이지요. 199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모든 시대의 위기는 언어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거나 혹은 그 비판과 일치한다.”
앞서 국어사전에서는 문체에 “시대의 특성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문체가 현실을 반영한다면, 문체를 바꾸는 일은 어쩌면 현실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문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과 쓰는 글이 같은 문체가 나타나고, 그리하여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가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레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다를 것입니다.
결국 그런 시대는 느리지만 언젠가 오지 않을까요? 정조가 시대의 흐름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이옥은 살아남아 죽을 때까지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고 줄기차게 글을 썼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정조가 지키려 했던 문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반면 이옥이 지향한 문체는 살아남았습니다. 이옥의 솔직담백한 문체를 한 번 감상하시라고 보내드리면서, 이만 글을 끝맺을까 합니다. 자유분방한 문체를 보면 왜 정조가 싫어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지금 내가 술을 마시면서 술병을 잡고 흔들어 보면 마음이 술병에 있게 되고, 잔을 잡아 술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면 마음이 술병에 있게 되고, 안주를 덜어 목구멍으로 넘기면 마음이 안주에 있게 되고, 손님에게 잔을 돌리면서 나이를 따지면 마음이 손님에게 있게 되어, 손을 펼칠 때부터 입술을 닦는 데에 이르기까지 잠시 걱정이 없다. 신변에 걱정이 없어지고 처한 곳에 걱정이 없어지고 때를 잘못 만난 것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니, 이것이 내가 술을 마시면서 걱정을 잊는 방법이요, 술을 많이 마시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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