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신문을 어색하고 어렵게 만들까?

2014. 9. 3.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출처_ nab 



신문을 많이 읽다보면, 신문 속에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는 어투를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하지만, 신문에서 쓰였기 때문에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씁니다. 하지만 신문이 항상 옳다고 볼 수 없죠. 신문에는 습관처럼 굳어져 변화를 보이지 않은 단어나 글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찬찬히 신문을 보면 어색하게 보이는 단어와 맞춤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 부담스럽고 어색한 내용을 찾아보겠습니다.



 부담스럽고 어색한 ‘개시’


개시(開始)라는 단어는 “행동이나 일 따위를 시작함”을 뜻하죠. 공문서와 언론 매체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흔히 쓰는 ‘시작(始作)’보다 사용되는 공간이 제한적이죠. ‘사격 개시’ ‘행동 개시’와 같은 말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 아니죠. 군대나 이를 묘사한 소설에서만 부담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무전병의 보고를 받자 중대장이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사격 개시를 명령했다.”

 안정효, <하얀전쟁> 중


일상에서 ‘개시’는 대부분 어색함을 줍니다. “너, 빨리 다이어트 시작해”라고 하지 “개시해”라고 하지 않죠. ‘작업 개시’보다 ‘작업 시작’이 부드럽게 다가옵니다. ‘시작’이 광범위한 공간에서 사용된다면, ‘개시’는 특정한 공간에서 주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답니다. 서로 넘나듦도 있지만, ‘개시’가 ‘시작’을 대신하면 거부감이 생깁니다. 반대로 ‘개시’를 대신해서 ‘시작’을 쓰면 어울리죠. 애초 ‘시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개시’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1994년 8월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의 강의 내용을 소개한 연합뉴스 기사를 참고할 만합니다.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일본식 조사로 ‘-에 있어서’ ‘-을 통하여’ ‘-이래로’ ‘-으로서의’ 등을 지적하고 번역문이나 일상어에 버젓이 등장하는 일본식 한자어로 ‘개시’(‘시작’이 좋은 우리말), ‘식량’(양식), ‘작물’(곡식), ‘왕래’(내왕) 등을 예로 들었다.”


‘개시’가 일본식 한자어이니 사용하지 말자고 하기는 어렵죠. 이런 종류의 다른 말처럼 ‘개시’도 한국어 어휘 속에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들과 얽혀 쓰임새를 확고히 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말들보다 넓게 자리하거나 뿌리가 더 깊지는 않아 보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출처_ flickr by Alan Cleaver 



지난 3월 산림청의 업무별로 분산돼 있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합한다는 보도 자료를 내놓았습니다. 산림청은 보도 자료의 첫 문장에서 ‘개시’라고 했죠. 


“산림청은 10일부터 국민과의 소통과 신속한 정보 제공을 위하여 전면 개편·통합한 산림청 대표 포털 웹사이트(www. forest.go.kr) 서비스를 개시한다.” 

“포털 웹사이트의 서비스를 지난 11일부터 개시했다.”


보도 자료에 있는 ‘개시’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자에게 어색함을 전했죠. 보도 자료를 분석해 기사를 쓰듯이 거기에 사용된 단어도 다시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음의 예들도 마찬가지죠. ‘개시’보다는 일상에서처럼 ‘시작’이 더 낫습니다. 


㉠ 아산시 온양6동 주민자치센터가 준공돼 23일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개시한다.

㉡ 포천복합화력발전소가 상업 운전을 개시할 계획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한국 불교문화사업단이 템플 스테이 무료 체험 이벤트를 개시한다.

㉣ 국무부는 이들이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4자 협상을 열흘 안에 개시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불편하고 모호한 접미사 ‘-적’


일본의 헌법에는 ‘전수방위’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일본이 직접 공격받았을 때만 방위력을 행사한다는 뜻이죠. 아무리 가까운 나라가 공격을 받아도 일본은 무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즉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일본 역대 정권은 이를 굳게 지켰죠. 하지만 새로 들어선 아베 신조 정부는 달랐습니다. 끊임없이 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이어 갔죠. 결국 아베 정부는 지난 7월 1일 내각회의에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공식 인정했습니다. ‘일본과 밀접한 나라가 공격받았을 때 일본이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었죠.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지 않아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일본의 강제합병으로 피해를 입었던 우리에게는 특히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기사가 쏟아지는 계기가 됐죠. ‘집단적 자위권’이라는 용어가 얼굴을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래도 좀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죠. 


‘집단적 거주’보다 ‘집단 거주’가, ‘집단적 결의’보다 ‘집단 결의’가 자연스럽듯이 ‘집단 자위권’이 편하게 다가옵니다. 신문 제목이나 방송 뉴스에서는 제법 ‘집단 자위권’도 보였지만, 큰 흐름은 ‘집단적 자위권’이었죠. 사전에도 표제어로 올라 있고, 이전부터 주로 이렇게 써 왔으며, 일본의 언론 매체들도 이렇게 표기 했습니다.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출처_ 노컷뉴스 2014. 7. 1.



‘집단적 자위권’에서 독자나 시청자들이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다분히 ‘적’탓입니다. 접미사 ‘-적’도 많은 한자어들처럼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죠.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은 영어의 ‘-tic’을 ‘적(的)’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적’이 들어와 우리나라에서도 쓰이기 시작했죠. ‘-적’은 편리함을 주었고 여러 상황에서 사용되며 보편성을 갖게 됐습니다. ‘감상적’ ‘개방적’ ‘민족적’ ‘이국적’ 같은 말들에서 ‘-적’은 그 성격을 띠는 ‘그에 관계된’ ‘그 상태로 된’의 뜻을 더하는 구실을 했죠. 


그렇다고 접미사 ‘-적’이 만사형통은 아니었습니다. ‘-적’은 대부분 한자어에 붙었을 때 잘 어울리죠. 고유어 ‘마음’ ‘몸’ ‘일’에 ‘-적’이 붙으면 어색합니다. 한자어에 붙을 때도 항상 자연스러운 건 아니죠. 거추장스럽고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경제적 중심이 되기 위해’ ‘사회적 빈틈 메우기’ ‘실천적 계획 수립’은 약간 억지스럽게 쓰였습니다. ‘경제의 중심’ ‘사회의 빈틈’ ‘실천 계획’이면 충분하고 좋죠. 굳이 ‘적’을 넣어 효과가 없죠. 불편함을 주고, 비효율적인 ‘적’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 미래 시장에서 차별적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 축구 선수의 멘탈은 필수적 요소

㉢ 남과 북의 분단적 상황을 이용한 지능적 테러를 일으키는

㉣ 특히 동북아에서는 고립적인 상태입니다.


㉠에서 ‘차별적 경쟁 우위’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차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기’라고 하거나 ‘차별적’을 빼고 ‘경쟁 우위를’이라고 하면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이해가 됩니다. ㉡의 ‘필수적 요소’에서 ‘적’은 빼야 좋습니다. ㉢의 ‘분단적 상황’은 ‘분단 상황’, ㉣의 ‘고립적인 상태’는 ‘고립된 상태’라고 해야 자연스럽습니다.


‘-적’은 모호함을 줄 때도 있습니다. 이미 굳어졌고 널리 쓰이는 ‘양적완화’ ‘사화적 약자’ ‘사회적 기업’에서 ‘적’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다른 방식의 표현으로 되돌리기는 어렵죠. ‘집단적 자위권’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시나 노랫말에서 온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다리 ‘-적’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자칫 굳어져서 어색하게 남을 때가 있으니까요.




 신문의 굳어진 습관은 벗어나도록


기관이나 단체, 기업에서 나오는 자료는 아직 자연스럽지 않아 어려운 말이 많은 예입니다. 딱딱하고 근엄하고 행정적일 때가 있죠. 하지만 신문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쓰는 일상 언어와 비슷하게 쓰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일상 언어와 가깝고 내용이 충실하면 언제나 사랑받죠. 굳어진 언론의 언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에 가까워져야 하는 까닭입니다.


위의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7월, 8월호에 실린 

이경우 서울신문 어문팀 차장·한국어문기자협회장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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