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방한 4박 5일, 위로 받은 우리 사회에 남겨진 숙제는?

2014. 9. 23. 13:01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것을 원했을까.’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간의 교황 방한 기간을 취재하면서 많이 들었던 의문이었습니다. 교황은 14일 서울공항에 도착해 환영식을 하고 바로 청와대로 갔습니다. 청와대에서 공식 환영식이 열렸죠. 한 방송사 기자는 취재 후기를 통해 서울공항에 도착해 평신도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날 때 따뜻했던 교황의 표정이 청와대 대정원 연단에서는 불편해 보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일체의 격식과 권위를 배격하고 낮은 곳으로 어두운 곳을 찾았던 분 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휘장과 총, 그리고 물론 의장대 사열용이기는 하지만 칼을 찬 군인들을 동원한예의가 얼마나 반가웠을지 의문”이라는 것이었죠.



 교황을 불편하게 만든 것들


실제 교황이 청와대에서 표정이 불편해 보였는지는 보기 나름일 겁니다. 그러나 저도 이 비슷한 느낌을 4박 5일 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번 교황 방한이 국빈 방문은 아니었지만 경호·의전 등을 정부가 맡아서 진행한 것과 무관치 않을 텐데요. 14일 서울공항 환영식 취재에 갔을 때였습니다. 당일 아침에서야 환영식에 참여하는 사람들 명단이 발표됐습니다. 세월호 유족, 새터민, 이주노동자 등 평신도 대표 32명. 저는 교황을 처음 만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들의 기대감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오전 10시 30분 교황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특히 세월호 유족들 앞에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라는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넸죠. 환영식이 끝나고 저는 당연히 교황을 만난 사람들의 심경도 인터뷰해야겠다 싶어 세월호 유족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정부 관계자에게 호된 주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서울공항은 군공항이기 때문에 아무데나 다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죠. 우선 유감을 표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까지 혼이 날 일인가’ 싶었습니다. 게다가 제 동선이 위험했다면 분명 제지했을 텐데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로마에서 떠날 때도 환송식을 안 했고 노숙자를 자신의 생일에 초대하는 격의 없는 교황이 이런 격식을 알았다면 뭐라 생각했을까요.


17일 충남 서산 해미성지에서도 황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은 교황이 아시아 주교단을 만난 날이었는데 두 명의 기자가 “재킷을 입지 않았다”는이유로 취재 현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사전에 ‘드레스 코드’ 공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현장의 정부 관계자는 “그렇게 드레스 코드를 말했는데 안입고 왔다”며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경호원인 듯한 사람이 오히려 현장에서 쫓겨난 기자를 예배당에서 데리고 나온 뒤 비오는 처마 밑에 서 있으라고 친절하게도 자리까지 안내해줬다는데요. 교황이 과연 ‘드레스 코드’를 그렇게 따지는 사람이었을까요.



출처_ 교황이 남긴 메시지, ‘보수 한국 가톨릭’ 바꿔놓을까 / 경향신문



지난해 3월 교황이 즉위하고 나서 바티칸 경호실 직원들이 ‘베이비시터’가 됐다고 합니다. 시민들을 직접 만나길 원하고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는 교황 덕분에 경호실 직원들의 업무가 바뀌었다는 것이죠. 시민들을 막는 역할만 해 오던 경호실 직원들은 이제 교황에게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교황이 아이에게 축복하거나 키스해주면 다시 부모에게 데려다주는 역할을 합니다. 방한 중에도 교황청 경호실 직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볼 수 있었죠. 윗사람이 바뀌면 조직의 문화가 바뀐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서울공항에서 저를 제지했던 공무원도, 해미성지에서 취재를 제한했던 공무원도 자신이 적응해온 조직 문화대로 행동한 것일 것입니다. 그 조직 문화는 안타깝게도 대부분 조직의 수장이 보여준 모습, 보여준 메시지 등에 좌우됩니다. 결국 어떤 리더십인가의 문제죠. 교황이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 숙제의 대부분은 교황의 리더십을 왜 우리는 갖지 못했을까 아니었을까요. 저는 취재 현장에서 불쾌함을 느낄 때마다 우리 정부의 엇박자를 생각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연 그것을 원했을까’ 생각했습니다.



 교황의 위로, 우리 모두를 위로하다


방한 일정에서 세월호 유족과 실종자 가족에 대한 교황의 위로는 기대보다 훨씬 비중이 컸습니다. AP통신은 교황 방한을 정리하는 기사에서 16일 광화문광장 시복식에 앞서 카퍼레이드 하던 교황이 차에서 내려 세월호 유족 김영오 씨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어준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꼽기도 했습니다.

이날 교황은 김영오 씨의 두 손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고 김 씨가 건네는 노란 봉투에 담긴 편지를 직접 자신의 주머니에 넣기도 했죠.


둘째 날이었던 15일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도 세월호 생존 학생과 유가족 등 30여명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 차에서 내려 이들의 손을 잡아줬습니다. 또 미사를 집전하기 전 제의실 앞에서 10명을 만나 교황은 일일이 얘기를 들어줬습니다. 그리고 이날 교황은 세월호 가족들을 위해 삼종기도를 올렸습니다. 도보 순례한 이호진 씨가 등에 지고 온 130㎝ 길이에 무게 6㎏의 십자가를 받아서 로마로 가져가겠다고 약속했고 이 씨가 세례를 부탁하자 17일 직접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줬습니다.



출처_ 경향신문 페이스북



교황이 18일 한국을 떠나면서 마지막 남긴 메시지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교황의 위로는 의례적인 듯하면서도 깊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편지에서 10명의 실종자 이름을 일일이 불렀습니다. 편지 마지막에는 교황이란 표현 대신 ‘Servus Servorum(종들의 종) 프란치스코’라고 적은 뒤 자필로 서명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노란 리본 배지는 방한 내내 교황의 왼쪽 가슴 위에 달려 있었습니다. 한기자가 교황에게 질문했습니다.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황은 대답했습니다.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해줬습니다.”


교황은 또 “인간적인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를 생각하면 그 고통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내 위로의 말이 죽은 이들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없지만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면서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누가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이렇게 위로했을까요. 교황의 위로는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던, 점차 무관심해져가던 우리 사회에도 위로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던 리더십


교황이 오기 전 많은 사람들은 교황의 일정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방한 일정이 교황이 즉위 이후 보여준 모습과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빈민촌이나 갈등 현장인 경남 밀양·제주 강정마을 등과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등을 방문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교황답지 않은 행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교황 방한은 대전교구의 요청에 따라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참석이 확정된 뒤 11월로 예정됐던 124위 시복식이 합쳐지면서 윤곽이 나왔습니다. 준비 과정이 5개월밖에 안됐죠. 원래 방한 준비는 전국 교구 연합체인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맡아야 하는데 일정상 대전교구와 서울대교구가 중심이 돼 진행됐습니다. 그러면서 가톨릭 일각에서는 교황 방한 방향에 대한 토론이나 합의 없이 행사 위주로만 짜여진다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방한을 며칠 앞두고서는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중이었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복식 행사 때문에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것이냐 하며 루머가 나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황방한준비위 위원장이었던 강우일 주교는 “눈물 흘리는 사람을 내쫓고 예수님께 사랑의 성사를 거행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죠.


 

출처_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방송 9월호 / 연합뉴스



방한 일정은 그렇게 교황답지 않다고 평가받았지만 실제 방한 이후 교황이 등장하는 곳마다 그가 만나는 사람, 그의 행동 등이 화제가 됐습니다. 처음의 우려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았죠. 한 천주교 관계자는 교황청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장과 연결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작은 차를 탄다’ ‘메시지 중심으로 간다’ 등은 다 교황청에서 내놓은 원칙이었는데요. 방한 일정을 크게 바꾸긴 어려웠지만 실제 행사마다 초대하는 사람들은 교황청에서 직접 조율했다는 것입니다. 첫날 공항 환영식에 초대된 세월호 유가족 등 평신도 32명과 마지막 날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한 1,000여명의 명단은 이렇게 완성됐습니다.


꽃동네는 교황의 방한 일정 중 가장 논란이 많이 됐던 곳이죠. 그런데 희망의 집에서 장애인들을 만나는 교황의 모습을 보고 누가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한 신부님께서 “희망의 집에 사진기자와 영상 취재진이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모습에서는 더더욱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황은 원래 장애인과의 만남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 주최 측은 행사 시작 전 사진기자들에게 “교황님이 장애인들의 사진을 많이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행사 중간에 나가라고 할 수 있다”고 고지하기도 했는데요.

원래 이날 교황은 장애 아동들을 바라보면서 정면에 놓인 의자에 앉기로 돼 있었는데 계속 서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결국 저기안 앉으시네”라고 말씀하셨는데 교황은 이번 방한 중 여러 번 주최 측에서 마련한 의자에 앉지 않았다는 겁니다.


장애 아동들 옆에 나란히 서서 아이들의 공연을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는 교황의 모습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크고 화려한 의자에 앉는 순간 결국 서 있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막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출처_ 한국 방문하는 교황…한반도에 평화의 빛 비칠까 / 한국경제



 작은 약속도 소중히


4박 5일간의 일정이 끝나고 교황은 돌아갔습니다. 무력감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교황은 우리 사회에 위로를 전해줄 수 있을 뿐 그 무엇도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권위는 섬김”이라고 말해 온 교황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였습니다.


18일 로마에 도착한 교황은 치암피노 공항에서 바티칸으로 가는 길에 산타마리아 마지오레 대성당에 들러 성모상 앞에 꽃다발을 올렸습니다. 이 꽃다발은 교황이 서울의 명동성당 미사를 집전하러 가는 길에 일곱 살 소녀에게 받은 것입니다. 교황은 이 소녀에게 꽃을 “로마로 가져가 성모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고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작은 약속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작은 자들에게 가장 친절하고 아픈 자들에게 제일 따뜻한 사람, 그러면서 잘못된 질서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발언하는 사람. 교황이 돌아가고 ‘우리 스스로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고민만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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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9월호에 실린
임아영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