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드라마의 성공비결은 연민정을 보는 대리만족 때문?

2014. 11. 19. 12:57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출처_MBC드라마 ‘왔다! 장보리’ 중 캡처 화면



막장드라마는 남녀 간의 사랑 혹은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룬 가족멜로드라마의 변형으로 인물의 특성을 극화하고, 당대의 가치에 반하는 반인륜적인 사건들로 구성합니다. 경악할 반전은 단순한 출생의 비밀만으로는 부족하죠. ‘남편이 밖에서 나온 아이를 학대했는데 알고 보니 내 아들’(SBS 다섯 손가락)이거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친아버지’(MBC 메이퀸)로 밝혀지고 친구의 아이와 자신의 아이를 바꾸고, 친구의 남편을 빼앗으며(MBC 사랑했나봐) 살아있는 부모를 죽은 걸로 꾸미고 고아행세를 합니다(MBC 왔다! 장보리). 현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악행을 저지를수록 드라마의 인기가 올라가며, 욕하면서 보는 재미는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배가되는데요, 매일 분노게이지를 조절하며 사는 현대인들에게 막장드라마는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욕할 수 있는 좋은 먹잇감인 셈이죠.



 숨겨진 욕망의 대리만족


막장이라는 용어는 SBS ‘아내의 유혹’(2008)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됐습니다. 그 연원은 MBC ‘인어아가씨’(2002), SBS ‘하늘이시여’(2005), MBC ‘오로라공주’(2013) 등으로 이어지는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죠. 한때는 막장을 부정적으로 쓰지 말라는 대한석탄공사의 항의도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막장은 한국 드라마의 한 장르로 굳어졌습니다. 막장드라마의 인기는 리얼리티를 더 이상 찾지 않는 시청자, 재미와 시청률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제작진, 날로 삭막해진 사회에서 좀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찾는 현대인의 무의식적 욕망이 배경이라 할 수 있죠.


프로이트는 평소 인간의 의식 밑에 깊숙이 감춰져 있어 그 존재 여부조차 알기 어려운 무의식이라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엔 의식에서 받아들이기 너무 불쾌하거나 부담스러워서 자동 검열 기능을 통해 잘려 나가버린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숨겨져 있는데요, 막장드라마가 악평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청률을 보이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살아있는 부조리한 욕망들, 일상에서 이성으로 누른 악한 본능에 대한 대리 소비의 측면도 있겠죠.



출처_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 캡처



막장드라마 출연자들은 일단 목소리가 큽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죠.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때는 늘 문이 조금 열려서 다른 사람에 의해 목격되며, 일급비밀은 모두 ‘엿듣기’로 알려집니다. 집에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회사에 나타나는 등 사람들은 순간이동이 가능하며, 마음만 먹으면 당장 유학길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장드라마 시청자들은 개연성이나 리얼리티를 따져 묻지 않는데요, 마치 다 알고 속아주는 리얼리티 쇼처럼 줄거리와 승부에만 집중하며 결국 음모가 밝혀지는가, 배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가를 궁금해 할 뿐이죠.


하지만 악역이 하루 빨리 단죄되기를 바라기보다는 되레 악역의 전능함과 그들의 악행을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침연속극 ‘사랑했나봐’의 악역 최선정이 자신에 대한 음모를 기막히게 알아채고 때마다 위기를 모면하자 시청자들은 ‘최느님’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요, 상상을 초월하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위기 탈출에 성공하는 ‘야왕’의 주다혜(수애)나 거짓말과 둘러대기의 달인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이유리) 역시 악역이지만 인기가 있는 캐릭터였죠. 과거 인기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으면 실제로 길 가다가 멱살을 붙잡히기도 하고 노인들에게는 심한 욕을 듣기도 했지만, 요즘 시청자들은 착하기만 한 주인공은 오히려 가식적이며 비현실적이라 외면하고 악역들을 현실적 인물로 봅니다. 주인공보다 악역의 매력에 집중하는 스토리텔링은 막장드라마의 새로운 스토리텔링 컨벤션입니다.


막장드라마의 또 다른 매력은 빠른 진행과 긴장감 유지에 있습니다. 도입-전개를 생략하고 위기-절정-위기-절정이 반복되는 플롯으로 인물의 행동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자극적인 사건들만 나열하여 시청자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죠. 사건의 앞뒤 맥락은 부족하지만 주인공들의 격렬한 감정 연기는 자연스럽게 몰입을 유도합니다. 



출처_ SBS드라마 ‘아내의 유혹’ 중 한 장면 캡처



 인류의 집단무의식, 출생의 비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는 멜로드라마의 두 주인공이 배다른 남매로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과 같은 진부한 스토리가 반복되는 드라마들이 상투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다수 시청자의 열광을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거기에는 우리 사회 전반의 어떤 원형적인 욕구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원형적인 욕구에 대해 프로이트는 ‘가족소설(family romance)’ 이론으로 설명하죠.


프로이트는 대부분의 소아신경증 환자들이 자신의 부모를 친부모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소설을 쓰듯이 가공의 가족관계를 상상 속에서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실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요, 이 가공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부터 프로이트는 인간은 누구나 어린 시절에 그런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만들어내지만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거치면서 그러한 망상에 집착하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출처_MBC드라마 ‘오로라공주’



결국 가족소설이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렇듯이, 인간이 성장해가면서 당연하게 맞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는 하나의 심리적 기제입니다. 태어나 부모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던 아이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의 관심과 보살핌이 줄어듦을 느끼는데요, 동생이라도 생긴 경우 가족의 사랑을 나눠가지게 되면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하죠. 부모가 낯설게 여겨진 어린이는 이제 그 부모를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결과 그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아니라 자신을 키워준 사람들일 뿐이라고 결론짓고, 자신의 친부모는 왕족이거나 귀족이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 믿습니다. 언젠가 그의 진짜 부모가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 마침내 그를 본래의 가족으로 되돌려줄 것이라 기대하며 이야기를 만드는데요, 이것이 가족소설입니다.


많은 동화에서 가족소설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떠돌이 곡예사에게 팔려 전국을 떠도는 ‘집 없는 천사’의 주인공 레미는 나중에 거대한 부호의 잃어버린 아이로 밝혀지죠. TV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은 프로이트의 가족소설 이론에서 비롯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초라하고 남루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현대인들의 무의식적 욕망은 프로이트가 만난 소아신경증 환자들처럼 내 인생을 일시에 반전시킬 수 있는 출생의 비밀을 알려줄 가족소설을 꿈꾸는 것이죠.



 막장 코드의 종합판 ‘왔다! 장보리’


10% 이상의 실시간 시청률만 나오면 성공으로 보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30%를 넘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한 MBC 주말연속극 ‘왔다! 장보리’는 출생의 비밀, 욕망과 음모, 사랑과 배신, 신데렐라 등 막장드라마 컨벤션을 총 망라했습니다.


드라마 초반에는 출생의 비밀을 소재로 가족 간의 갈등과 음모를 다룬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였으나, 중반부터 신분상승에 대한 끝없는 욕망으로 장보리에 대한 음해를 멈추지 않는 연민정의 초인적인 악행이 화제가 되어 드라마 재미에 탄력이 붙었는데요.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악녀의 정체가 다 밝혀지지만, 매회 경악할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어 악행을 이어가는 연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치열한 전투장면을 관전하는 듯한 짜릿함을 주었습니다. 처단 받아야 할 악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강해져서 주인공을 괴롭히고, 시청자들은 악녀의 파멸을 보고 싶은 한편 연민정의 악행이 어디까지 갈까 궁금해 하며 오히려 악행관전을 즐기는 듯했죠.



출처_MBC드라마 ‘왔다! 장보리’



종영이 임박했으나 작가는 악녀의 처단을 미루고 악녀에게 경합의 기회를 주어 새로운 갈등 국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한류 드라마 ‘대장금’의 경합 플롯을 가져와, 장보리와 연민정은 한복 명장의 자리를 건 한판 대결을 벌였는데요, 대장금의 최상궁이 그랬던 것처럼 연민정은 부정한 방법으로 경합에서 이길 결정적인 무기를 손에 넣었으나 부정한 방법으로 강해진 캐릭터는 마지막 승자가 될 수 없는 것이 전통서사의 컨벤션이듯 결국 연민정은 파멸하고 모두에게 버림받는 비참한 종말을 맞습니다.


출생의 비밀과 신분상승 욕망이라는 막장드라마 요소를 잘 섞어 한 주 방영분마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는 연민정의 사악함이 밝혀지면서 해결되는 듯하지만, 연민정 주변 사람들의 탐욕과 음모는 연민정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악행을 이어가게 만들었죠.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려는 꼼수이기도 했으나 인간 내면에 숨겨진 욕망의 바닥을 슬그머니 보여주는 치밀한 대목입니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연민정의 신들린 연기에 소름이 돋았다는 호평이 쏟아졌고, 제목을 ‘왔다! 연민정’으로 바꾸자는 건의도 올라왔다고 합니다. 비술채 딸 자리를 되찾고 재벌 2세와의 결혼에 성공한 장보리는 이제 더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듯, 시청자 게시판에는 연민정에 대한 비난이나 동정의 글들로 가득했습니다.



 막장의 끝, 용서와 화해


욕망의 화신이며 시대의 악녀인 연민정에게 시청자들의 관심이 모아지자 작가조차도 연민정의 과거를 잊은 듯 새로운 연민정을 만들었습니다. 연민정은 자신을 따라 물에 빠졌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생모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모습은 아줌마라 부르며 서슴지 않고 심한 말을 쏟아내던 그 연민정은 온데간데없죠. ‘왔다! 장보리’의 악역 연민정은 마지막 방송에서 갑자기 지순한 사랑을 품은 순정파이며 죄를 뉘우쳐 스스로 대가를 치루는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처음부터 장보리를 시청하지 않은 시청자는 종영이 가까워지면서 연민정이 상대역인 이재희를 사랑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로지 성공에 대한 욕망만이 있었던 연민정은 언약식까지 하고 같이 살았던 문지상이 고시에 떨어지자 가차 없이 그를 떠납니다. 적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성공에 집착하는 재벌의 서자 이재희는 연민정에게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 됐죠.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 후 모두 거짓으로 꾸민 자신의 정체를 잘 숨기고 결혼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재희 역시 양딸이지만 ‘비술채’를 물려받을 수 있다고 믿고 연민정을 선택하는데요, 하지만 연민정의 거짓 정체가 밝혀지자 사랑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비술채의 적통을 형에게 뺏겼다는 상실감에 더 괴로워합니다.



출처_MBC드라마 ‘왔다! 장보리’ 중 한 장면



원시 부족사회에서 결혼은 부족 간 평화협정을 맺고 그 증거로 서로의 자녀를 결합시킨 일종의 계약이었습니다. 고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결혼은 왕조나 귀족계급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집안 간의 거래였죠. 19세기가 끝나면서 유럽의 왕조가 사라지고 귀족계급이 신흥 부르주아계급의 재력에 무력해지면서 결혼은 명성과 부의 정당한 결합을 위한 도구가 됐는데요. 상거래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은 몰락한 귀족들과 사돈을 맺고 싶어 했으며, 빈털털이가 된 귀족들은 부르주아계급의 재화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는 서구 로맨티시즘이 등장한 것은 세기말에 성행한 부와 명성의 결합에 대한 반발이었죠. 우리의 막장드라마뿐 아니라 서구의 많은 멜로물들이 사랑, 배신, 음모, 복수 등으로 가득한 것은 순수한 사랑을 표방하는 로맨티시즘의 비현실성에 대한 심리적 좌절이기도 합니다.



 허탈한 억지 결말


어떻게 연민정이 파멸할지 궁금한 시청자들을 약 올리듯 연민정은 개과천선하고, 과수원을 하는 문지상 옆에는 눈 밑에 점이 있는 연민정을 데려다 놓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이 된 ‘아내의 유혹’을 패러디해 이름도 민소희이죠.


TV 드라마이며 더구나 지상파 드라마의 한계 때문에 용서와 화해를 표방한 억지 결말은 참을 수있으나 드라마를 개그 프로로 만든 작가와 제작진의 가벼운 태도는 불쾌함을 주기도 하는데요, 무슨 이유에서 점 있는 연민정을 등장시킨 것일까요? 죽도록 미워했지만 연민정에 대한 사랑을 지우지 못한 문지상은 연민정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는 순정을 알리려는 것일까요? 마치 드라마가 끝난 후 개그콘서트에서 마련한 패러디 코너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출처_MBC드라마 ‘왔다! 장보리’ 중 한 장면



신분상승에 눈이 멀어 엄마도 자식도 버린 연민정을 감싸느라 보리에게 가혹했던 연민정의 생모는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고 보리에게 국밥을 나르게 했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습니다. 개과천선하여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엄마를 모시고 국밥집을 하는 연민정은 예전에 보리가 받았던 구박을 그대로 받으며 국밥을 나르며 지냅니다.


이재희가 불 속에 던진 결혼반지를 화상을 입으면서도 꺼내 손에 꼭 쥐고 곱은 손으로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연민정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인물일까요? 51회까지 드라마에서 고함을 치고 포악을 부리던 시대의 악녀는 어디로 가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옛사랑을 지키는 순정녀가 돌아왔을까요? 어차피 개연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막장드라마이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마지막회까지 충실하게 본 시청자로서 허탈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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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11월호>에 실린

허 은 / 청강문화산업대 콘텐츠스쿨 교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