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간 뉴스> 맥주의 참맛은 혀끝보다도 목구녁

2015.06.25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하로종일 시달닌 몸을 끄을고 집으로 돌아오면 안해의 반가운 낫을 보고 정신적 위안을 늣기는 한편에 차듸찬 삐-루를 한곱뿌 쭉 마시면 육체적으로 얼마나 생신한 위안이 되겟습닛가-”


1937.06.28_매일신보 3면_麥酒의 참맛은 혀끝보다도 목구녁, 온도는 보통 우물정도가 제일, ˝거픔˝의 효용도 크다


맥주에 대한 맥주黨의 맥주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나 봅니다. 

불볕 같은 여름, 살짝 얼린 유리컵에 그득 담긴 생맥주 한 잔이 마냥 생각나는 맥주의 계절 여름입니다. 맥주 없는 여름은 생각할 수도 없는 지금, 우리는 맥주를 어떻게 만났을까요?


너무나 씁쓸했던 첫 맥주의 기억


1871년 신미양요 직전 미군함에 승선했던 문정관(問情官) *문정관: 조선 후기 외국 선박이 나타나거나 외국인이 표류할 때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된 관직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에는 삿뽀르, 기린, 에비스 등의 일본맥주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맥주를 처음 마신 조선 사람은 외국인이나 극소수의 특권층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신 맥주는 미국맥주였습니다. 1871년 강화도 인근엔 5척의 미군함이 정박했습니다. 이들은 셔먼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의 개항과 통상교섭을 요구했고, 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문정관이란 하급관리가 조선대표로 미군함에 승선했습니다. 승선했던 문정관들은 맥주를 대접받고 신기한 빈 맥주병을 한 아름 안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맥주를 대접했던 미군들은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죠. 하여간 그 때 맥주를 처음 마신 사람들은 바로 그 문정관들 일행이었는데, 그렇게 뒷맛이 쓴 맥주는 없었을 겁니다.


도리어 효험 있는 맥주?


1901.06.21_ 황성신문 3면_광고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는 일본 맥주들이 들어왔고, 1900년 초기 황성신문엔 각국의 맥주소비량이나, 독일의회가 맥주세를 가결했다는 기사까지 실렸습니다. 맥주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면 당연히 판매를 위한 광고도 시작되죠. 한성에 있는 구옥상점은 당시엔 흔하지 않은 삽화가 들어간 광고를 내거나, “세상에 주류는 여러 백가지 있으나 맥주같이 몸에 해롭지 않고 도리어 효험이 많은 것이 없소. 맥주 중에 이 인물표 에비스 맥주가 제일이며 세계 각국인이 매우 칭찬한 것이오.”라며 허위, 과장광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 맥주광고


하루 일당, 맥주 두병


1921.04.07_동아 3면_최근경성물가


1920년대에는 맥주 소비량이 증가하여 대표적인 물가지수 조사상품 중에 하나였고, 가격을 단속 받기도 했습니다. 


1921.04.21_동아일보 3면_관화시절의 단속


바가지요금이 극성인 꽃구경 시즌엔 점심상 1인분 1원, 맥주 한 병에 75전, 사이다는 30전, 비빔밥 50전 이상 받으면 단속을 당했거든요. 물론 이런 가격은 평시의 가격보다는 비싼 편이었지만, 그래도 ‘조선인 철공노동자의 일당이 70~80전에 불과한데, 이는 맥주 두병 값에 불과하다’(1924.08.01.-개벽 제50호-빈자의 녀름과 부자의 녀름) 고 한탄하는 글이 있는 걸보면, 역시 맥주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었습니다.


사건사고, 맥주


1929년엔 삿뽀로, 기린, 사쿠라의 3사가 한 병에 35전으로 가격 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맥주는 가격도 문제지만, 좋지 않은 품질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맥주나 사이다를 먹기 전에 병을 거꾸로 들어서 찌꺼기가 있는지 확인하라는 기사가 종종 실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잔에 따를 때도 다시 한 번 확인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고요. 


1932.08.28_매일신보 2면_맹물을 麥酒로 속히고 팔어 젼후 피해 六十여건 懲役二年을 言渡


1932년 신계호(27세)는 두 달 동안 60여 차례에 걸쳐 경성부근을 돌아다니며 맥주병에 그냥 맹물만 넣어 상인들에게 팔았답니다. 물을 좀 섞은 것도 아니라 맹물만 넣어 팔다니 그 배짱과 허술함에 웃음까지 나오는 사기사건이었지만, 신계호는 징역 2년을 판결 받았습니다.


대한광복회의거와 깨지지 않은 맥주병


맥주와 얽힌 독립운동가들의 에피소드도 소소하게 보입니다. 1921년 6월 이동휘선생은 모스크바로 가던 배위에서 맥주를 마셨답니다. 그때 신채호선생의 추천으로 이동휘를 수행하던 이극로는 맥주가 맛이 없어서 눈을 딱 감고 마셨고, 박진순은 맥주를 마시더니 모두 토했답니다. 이를 본 이동휘는 바닥을 다 닦으라고 훈계했답니다. 


맥주병을 의거에 사용한 일도 있습니다. 1917년 대한광복회원들은 총사령 박상진의 명령을 받고 영남부호인 장승원을 처단하기위해 그의 집을 찾아 갔습니다. 안에서 총소리가 나면 밖에 있던 요원은 석유가 담긴 맥주병을 던져서 불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맥주병은 깨지지 않았고, 다시 던지려다가 손까지 다쳐서 점화를 못했습니다. 이 의거로 친일부호 장승원은 죽었지만, 연루자들도 체포되고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도 사형을 당했습니다. 깨지지 않는 맥주병이 이렇게 아쉬운 적은 없을 겁니다.


쏘야가 뭐야? 치맥은 알아?


광복 이후 한동안은 OB맥주 아니면 크라운맥주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진로와 롯데까지 합세해서 많은 브랜드의 맥주가 출시되고 있고, 세계 각국의 맥주까지 판매되고 있습니다. 시대별로 선택되는 맥주가 변하는 것과 함께 선호하는 안주도 바뀌고 있습니다.


출처_파이낸셜뉴스


필자는 대학시절 ‘쏘야’파였습니다. 멕시칸샐러드도 좋아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안주들은 별로 찾지를 않더군요. 요즘은 저도 치맥파에 합류했습니다. 철저하게 저의 주관적 판단으론 별의별 종류의 치킨이 모두 맥주와 딱 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조화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나타나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니까요. 

아.. 맥주를 주제로 글을 쓰다가 결국 치맥까지 왔군요. 

이만 글을 마치고 치맥의 조화를 확인하러 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