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7. 09: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생활백과
쌍살벌에게 쏘이다
된장을 푸려고 항아리 뚜껑을 열다가 “악!”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열댓 마리의 성난 벌들이 항아리들 틈에서 왜앵~ 날아오르더군요. 오른쪽 손등과 팔에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어요. 우선 급한 대로 에프킬라로 벌들을 제압하고 된장 푸던 일을 마저 했지요. 시간이 지나자 손등이 점점 부풀어 올라 마치 복어처럼 앞뒤로 빵빵해졌어요. 몸무게 42킬로의 작고 야윈 체격이라 평소 오동통하니 살찌는 소망을 품고 있었는데 소원대로 되었지 뭐예요. 벌들에게 쏘인 자리는 욱신욱신 쑤시고 저리다가 나중엔 못 참을 만큼 가려워졌습니다. 하루가 지나자 팔꿈치 아래부터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다 부풀어 올라 펜이 쥐어지지 않았어요. 빨간 고무장갑에 손이 안 들어가는 경험도 난생 처음 해봤지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센한테 놀아달라고 떼쓰며 울던, 마녀 유바바의 아기 손처럼 나름 귀엽기도 했답니다. 아픈 와중에도 궁금증을 못 참아 여러 권의 곤충도감들을 늘어놓고 나를 공격한 벌을 찾았어요. 쌍살벌 종류인데 정확한 명칭은 큰뱀허물쌍살벌이더군요. 벌 쏘인 덕에 쌍살벌 종류를 배웠으니 그리 손해는 아니었어요.
거실 처마 그늘막에도 쌍살벌이 집을 지었어요. 새끼 키워내는 걸 지켜보다가, 한겨울에 자연스럽게 벌들이 떠난 후 떼어냈습니다.
우리집 처마 밑에는 해마다 쌍살벌들이 집을 지어요. 서너 마리가 바삐 오가며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짓기 시작하는데, 두어 달쯤 지나면 벌도 많아지고 벌집도 어른 주먹만큼 커져요. 운 좋으면 육각형 구멍 속에 오동통한 노란 애벌레들이 꾸물거리는 모습도 볼 수 있지요. 자칫 잘못 건드려서 쏘이지만 않는다면 벌집도 제법 재미있는 관찰거리입니다. 언젠가는 희한하게도, 대롱거리는 풍경(風磬) 속에 거처를 마련한 벌들을 봤어요. 바람 불면 땡그렁~ 땡그렁~ 온 집안이 시끄러울 텐데, 그 속에서 귀 막고 면벽 득도라도 해보겠다는 걸까요?
풍경 속의 벌집. 흔들림과 소란함의 한가운데로 스스로 찾아 들어가 집을 짓고 새끼들을 키우다니... 극한의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면벽 득도벌이라 할 만하지요.
벌한테 쏘일 땐 다 이유가 있어요. 위치를 정확히 아는 벌집은 오히려 위험하지 않아요. 항아리 뒤편, 야외테이블 아래, 나뭇가지 사이... 이런 곳에 벌집이 있는 줄 모르고 건드렸을 때 공격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벌이 우리를 급습했다고 하지만, 벌의 입장에서는 자기 집이 급습 당했기에 공격한 거예요. 그들의 사회, 그들의 새끼들을 지키려고요.
처음 시골살이를 시작했을 땐 벌집을 격퇴해야 할 적처럼 대했어요. 에프킬러를 뿌리고 각목을 휘둘러 떼어냈지요. 두려워서 미리 저지른 과잉방어였어요. 하지만 지극정성으로 집을 늘리고 애벌레를 키우는 벌들을 지켜보다 보니 나의 살심(殺心)이 슬그머니 주저앉더군요. 벌집 아래를 하루에 십수 번 오가더라도 내가 그것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벌들은 그냥 제 할일만 할텐데요. 물론 위협적인 위치라면, 사람도 야생의 자리싸움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요.
단독생활의 유전자, 호리병벌
거실 유리문 아래에 호리병벌이 독특한 집을 지어요. 호리병 모양의 집을 아파트처럼 연결해 짓는 거예요. 호리병벌은 호리병집 속에다 알을 낳고 알에서 깨어난 새끼가 번데기가 되기 전까지 일용할 양식(나방 애벌레)을 넣은 후, 순장하듯 집을 봉인합니다. 무덤이자 산실이지요.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요.
1) 집짓기 첫날, 봉긋한 1, 2번 집 위에다 3번 집을 짓고 나방 애벌레를 잡아넣었어요. 2) 이틀째, 3번 집을 봉인하고 4번 집을 오른쪽 아래에 지었네요. 구멍 속에 초록색 나방 애벌레가 꿈틀꿈틀 살아있어요. 3) 4번 집 위에 5번 집을 지었습니다. 4) 사흘째, 어미 호리병벌이 맨 꼭대기 6번 집을 마지막으로 봉인하고 있어요.
호리병벌 어미는 혼자 일합니다. 동글동글한 진흙덩이를 입에 물고 오가길 여러 차례, 드디어 6개의 집 속에 알을 낳은 후 모든 입구를 단단히 봉인했어요. 만 사흘이 걸렸습니다. 호리병벌은 집단생활을 하는 벌들과는 달리 새끼를 돌보지 않아요. 대신, 태어날 자식들의 미래를 준비해두지요. 제 할 일을 마친 어미는 자유롭게 2개월 남짓 떠돌다가 생을 마감한다고 해요. 단독생활의 유전자는 이 벌집 안의 알들에게도 각인되어 있을 거예요.
도감에 따르면, 어미가 마련해둔 먹이를 먹으며 애벌레 상태로 겨울을 난 새끼들은 내년 봄에 번데기를 짓고 어른 호리병벌이 되어 저 흙벽을 뚫고 나온다고 해요. 책에 그리 적혀 있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9월이 되니 흙집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어요. 두 달 만에 새끼 벌들이 나온 거예요.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고 해당 출판사에 연락해 답을 구했지만 회신을 얻지는 못했어요.
9월 초순이 되자 호리병벌의 흙집에 구멍이 뽕뽕 뚫렸어요. 어린 벌들이 나오는 장면을 보지는 못하고, 빠져나간 구멍만 확인했습니다.
이맘때면 곳곳에서 호리병벌의 집을 만날 수 있어요. 언젠가 호리병벌의 흙집을 부수고 초록 애벌레들을 꺼내 닭들한테 선물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막상 사흘 내내 집 짓는 '호여사'의 노고를 지켜본 후부터는 다시 그럴 마음이 들지 않더군요.
그들도 우리처럼, 우리도 그들처럼
겨울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벌들은 죽음을 맞을 적당한 장소를 찾아갑니다. 여왕벌은 겨울을 날 곳을 찾아 떠나고, 나머지 벌들은 마지막 자리를 고르는데 사람이 사는 집안으로 자꾸 기어들기도 해요. 현관 귀퉁이쯤에 봉분처럼 둥글게 모여 앉아 있다가 한 마리씩 힘없이 떨어져 내립니다. 그렇게 빈자리가 늘다가 어느 날 이장한 듯 벽이 말끔해져요. 뜨겁던 한 시절 복작거리며 새끼들을 길러냈던 벌집은 텅텅 비어 빈 허물이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가벼워진 벌집을 어렵지 않게 떼어내지요.
어느 추운 겨울날, 환기 좀 시키려고 꽁꽁 닫아걸었던 거실 창을 활짝 여니 창틀 아래 웅크린 벌 한 마리가, 죽을 때 죽을 자리 다 놓치고 날아갈 힘도 없이 찬바람에 가는 다리를 떨고 있었어요. 그때 이 하이쿠가 떠올랐어요. 전이정 씨의 <순간 속에 영원을 담는다>(창비)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겨울 벌이 죽을 자리도 없이 걸어가는구나
冬蜂の死にどころなく步きけり -무라까미 키죠오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 듯한, 메마른 풀
おちついて死ねさうな草枯るる - 타네다 산또오까
누구도 슬프게 하지 않은 채 풀은 메마르고, 벌들도 왔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우리도 그들처럼, 그렇게 한 생애가 돌아가면 거기에 또 새로운 생명들이 봄처럼 돋아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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