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 09: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생활백과
텃밭의 고추에 심한 탄저병이 들어 결국 고춧대를 다 뽑고 말았습니다. 탄저병은 고추가 타들어가는 병이에요. 한번 번지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일 만큼 치명적이라 일반 관행농법에서는 정기적으로 농약을 살포해 병을 방지하지요. 우리야 농약을 쓰지 않으니, 이랑과 포기의 간격을 넓혀 심고 탄저병이 생긴 포기를 일찌감치 뽑아내는 식으로 방어해왔는데요. 이 병 때문에 고추밭 전체를 포기한 건 올해가 처음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 건 아니에요. 고추가 연작(이어짓기)을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텃밭의 규모가 크지 않다보니 지난해 고추 심었던 자리에 또 고추를 심고 말았거든요. 또 하나 미심쩍은 건 종자예요. 8년째 이어오던 토종 종자를 올해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발아시키지 못해 종묘상에서 산 개량종 고추 모종으로 대체했는데, 농약 없이 키우기엔 종자의 체질이 약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올해는 고추에 탄저병이 심하게 들었어요. 농약도 안 칠 거면서 개량종 고추를 연작까지 했으니, 실패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졌지 싶습니다.
하늘에 삿대질하는 토종고추
쌀쌀한 초봄, 전해에 갈무리해둔 토종고추 칠성초 씨앗을 꺼냅니다. 고추씨를 젖은 거즈로 감싸고 마르지 않게 물을 뿌려가며 열흘쯤 실내에서 돌보면 아기 이빨처럼 예쁜 촉이 나와요. 그것을 모종판에 옮겨 심고 아침저녁으로 작은 비닐집의 보온덮개를 여닫으며 정성을 들입니다. 칠성초는 성장이 몹시 더뎌요. 모종판에서 2개월 넘게 키워도 일반 개량종 고추 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색도 누릿합니다. 오죽하면 동네 어르신께서 우리 고추 모종을 보시고는 “제대로 크지도 못할 거, 엎어버려!” 하셨을까요.
토종고추 씨앗이 아기 이빨처럼 귀여운 촉을 내밀었어요. 이 한 알의 씨앗에 담긴 생명의 가능성이 곧 미래입니다.
그래도 참 신기한 게, 그토록 형편없어 보이던 것들이 일단 땅에 뿌리가 닿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몰라보게 강인해진다는 거죠. 땅힘을 받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서 종묘상 고추보다 세가 더 왕성해집니다. 게다가 희한하게도 고추가 하늘을 향해 치솟듯이 자라요. 참 우스꽝스러워요. 고추 모양은 통통하고 고추피는 두껍고 단단한데, 병치레도 덜할 뿐 아니라 서리 내리기 직전까지 쉼 없이 꽃을 피우고 고추를 매답니다. 대기만성형 저력을 지닌 고추랄까요.
토종고추 칠성초는 빳빳하게 머리를 세우고 하늘에 삿대질을 하며 자랍니다. 저항 정신이 뻗치는 고추이지요.
오이꽃은 사랑하고 싶어요
씨앗을 받아 잇고 있는 우리집 작물로 토종오이도 있습니다. 처음 토종오이 씨앗을 발아시켜 키울 때,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오이의 줄기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어요. 동네 어르신께 여쭤봤더니 “본줄기에서만 오이가 달리니까, 그것 말고는 다 잘라!”라고 간단히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오이 곁줄기를 다 잘라내고 기다리는데, 뭔가 이상해요. 아무리 기다려도 본줄기에서는 수꽃만 필 뿐, 암꽃은 하나도 안 생기는 거예요. 피지 않는 암꽃을 기다리다 지쳐 포기할 즈음, 방치된 오이에서 뻗어나간 곁줄기에 암꽃 하나가 매달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제야 풀리지 않던 의문의 실마리를 찾았지요.
꽃받침에 아기 오이가 매달려 있는 게 암꽃이에요. 시중에 팔리는 오이는 개량종으로, 수꽃 없이 암꽃 혼자서 만든 오이입니다.
어르신이 이제껏 키워 오신 오이는 개량종이었던 거예요. 종묘상에서 파는 개량종 오이는, 어수선한 곁줄기가 도태되고 한 가닥 본줄기에서 오로지 암꽃만 핍니다. 수꽃도 없이 암꽃 혼자 오이를 매달아요. 사랑도 못해본 오이지요. 하지만 토종오이는 본줄기에서 수꽃들이 한참 핀 후, 뻗어나간 곁줄기에 암꽃들이 하나둘 맺힙니다. 그렇게 암수 오이꽃들이 서로 사랑을 나눠서 자식 오이를 만들어요. 작고 사랑스러운 토종오이의 달고 상큼한 맛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한입 깨무는 순간, 이제껏 알아온 오이 맛이 얼마나 밍밍한 것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면 좀 이해가 될까요?
어린 토종오이는 겨우 풋고추 크기만 해요. 먹을 만큼 컸다 싶을 때조차 개량종 오이의 1/4 크기에 불과하지요. 그 시기를 놓치면 바로 노각이 됩니다.
종자 주권, 지속 가능한 미래
콩이나 팥, 조나 수수 등의 곡류는 종자를 먹기 때문에 아직도 농가에서 자가 채종을 많이 하지요. 하지만 고추, 오이, 무, 배추 등 채소류 작물들은 종자회사가 파는 F1 잡종 작물이 대부분입니다. F1 잡종은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하도록 개량되어서, 농약과 비료까지 파는 종자기업의 이윤을 다각적으로 높입니다. 또한 채종을 해도 다음해 발아가 안 되거나 열매가 잘 맺히지 않아 농부들은 해마다 새 종자를 사야만 해요. 종자회사들은 신품종을 개발하는 한편 독점적 특허를 내세워 종자 값을 올립니다. 무씨 몇 알이 1만원을 넘고, 파프리카 씨는 g당 10만원이 넘어요. 종자의 주인이 농민으로부터 종자회사로 넘어가버린 겁니다.
지금 종묘상에서 주로 판매되고 있는 채소 종자들은 대부분 개량된 F1 잡종 종자들이다. 이런 F1 종자들은 재배하여 씨를 받았다가 다시 심으면 전혀 엉뚱한 것들이 나온다. F1에서는 우성이 발현되지만 그 후손인 F2에서는 열성이 드러난다. (...) 1997년 IMF 이후 우리 종묘회사들이 대부분 외국의 다국적 종묘회사로 넘어가 더더욱 종자 주권에 심각한 위해를 받게 되었다. - 안완식, <내 손으로 받는 우리 종자>(들녘) 중에서
우리집에서 해마다 종자를 이어 기르는 갓끈동부예요. 콩꼬투리가 갓끈처럼 늘어지는데 긴 것은 70~80cm까지 자라요. 꼬투리째 똑똑 끊어서 요리에 사용합니다.
종자 주권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수입된 콩과 옥수수로 만들어진 유전자조작작물(GMO)은 도시민과 농민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가공식품들에 버무려진 식품첨가물, 식용유나 간장의 원료, 동물의 사료를 통한 고기와 알로 변신한 GMO가 우리 밥상 깊숙이 들어와 있어요. 삶을 위협하는 오염된 씨앗의 배후에 몬산토와 같은 거대한 초국적 종자기업들이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토종은 모양도 덜 예쁘고 크기도 작고 수확량도 떨어지지만 이 땅의 생태계에서 수천 년간 적응과 진화를 거듭해온 종자라 병충해에도 잘 견디고 유기농업에도 적합해요. 토종 종자와 채종법에 대한 책을 읽으며 내가 지닌 씨앗을 점검해봅니다. 올해 병해를 입어 작파한 고추농사를 반성하면서 내년부터는 종자를 잇는 일에 게으름 부리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어요. 토종 종자를 잇는 일, 종자 주권을 지키는 일, 지속 가능한 농사를 짓는 일, 건강한 먹거리를 얻는 일이 다 하나로 통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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