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부패해야 건강한 식품

2015.10.15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생활백과




햇살이 베풀어준 소박한 저장법


하늘은 높고 햇살 눈부신 날, 붉은 고추를 갈대발에 펼쳐 널어요. 무릎 꿇고 엎드려서 고추를 낱낱이 펼치고 있자니 어깨와 잔등에 뜨거운 가을 햇살이 쏟아집니다. 이즈음 건조한 공기와 뜨거운 태양의 열기는 그냥 보내기엔 너무 아까워요. 고추만 말리는 게 아니라, 땀에 젖은 옷들과 눅눅한 여름 이불도 산뜻하게 빨아 널고, 겨울 솜이불과 솜베개도 꺼내 햇살에 소독합니다. 이 강렬한 볕은 설익은 곡식을 여물게 하고 모든 축축하고 습한 것들을 바스락바스락 가볍게 말려 버리지요. 


가을 볕 덕에 고추가 잘 말랐어요. 고추 말리는 중에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낭패입니다. 요즘엔 농가마다 건조기계가 있어서 대부분 기계로 급속히 말리는 추세지요.


텃밭의 가지가 쉬지 않고 달립니다. 며칠만 안 들여다보면 덤불 속 애호박도 주렁주렁 맺혀요. 한꺼번에 다 먹을 재간이 없으니 부지런히 썰어서 말립니다. 아주까리도 무성하게 자랐어요. 어렸을 때 엄마는 집 마당에 훌쩍 자란 아주까리 잎을 삶아서 줄에 길게 꿰어 처마 그늘에 걸어놓고 말리셨지요. 아주까리 묵나물을 집간장으로 밑간해 들기름에 달달 볶아 먹으면 씹히는 식감도 좋고 고소하니 참 맛있어요. 그 옛날 엄마 생각 하며,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손바닥을 활짝 펼친 이파리들을 뚝뚝 따서 데쳐 갈대발 위에 펼쳐 널었습니다. 하루 만에 바삭하게 말랐어요. 말린 아주까리, 말린 가지, 말린 호박은 내년 정월 대보름에 오곡밥과 잘 어울리는 풍성한 나물 반찬이 될 거예요. 


아주까리는 피마자라고도 하지요. 얼룩무늬 콩 모양의 씨앗으로 짠 기름은, 약재로 쓸 뿐 일상적으로 먹지는 않아요. 오래전 할머니가 쪽진 머리 단정히 매만질 때 피마자기름을 바르시던 기억이 납니다.


숲 그늘에 기대어둔 표고목에서 가을 표고가 와르르 피어났어요. 표고버섯도 썰어서 햇살에 말립니다. 지천에 쏟아지는 햇살은 넉넉하여 인색함이 없어요. 표고목 주변에는 밤송이들이 그득해요. 심심찮게 발로 밟아 까서 호주머니에 담아 옵니다. 도토리도 지천이에요. 시간 날 때 주워 모으면 나중에 묵가루를 만들 수 있어요. 이 모든 일들은 이맘때만 가능한 일들이에요. 그래서 가을은 겨우내 먹을 양식을 갈무리하는 농부의 손, 주부의 손이 무척 바빠지는 계절입니다. 


숲 속 나무그늘에 기대어둔 참나무 종균목에서 표고버섯이 돋았습니다. 숲에서 자라는 표고라 날씨와 기온에 의지하여 봄 가을에만 땁니다.


효소 거른 찌꺼기로 조청을 얻다


봄에 담가둔 쇠비름을 비롯한 갖가지 풀 효소, 보리수와 매실 효소 항아리들을 100일 만에 개봉했습니다. 효소를 거를 시기가 되었거든요. 커다란 채망을 이용해 종류별로 효소 즙을 내리고, 몇 방울의 진액이라도 더 모으려고 찌꺼기를 일일이 손으로 짜냅니다. 여덟 개의 항아리를 다 비워냈더니 찌꺼기 양이 무척 많아요. 달콤한 즙에 절여진 찌꺼기가 아까워서 닭들한테 줬는데 잘 먹지 않네요. 찌꺼기를 퇴비에 섞어본 적도 있었는데 양이 너무 많아선지 개미가 심하게 끓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바로 조청을 만드는 거죠!


바깥 화덕과 큰 솥은 시골살이에 꼭 필요한 살림이에요. 조청을 만들 때나 고구마를 삶을 때, 수세미오이로 천연수세미를 만들 때도 아주 요긴하게 쓰입니다.


바깥 화덕에 솥을 걸었어요. 양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라 주방의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어요. 솥 가장자리로 바그르르 끓어 넘칠 만큼 푹푹 끓인 후 뜨거운 찌꺼기를 건져서 짜냈습니다. 당분이 많이 빠진 찌꺼기는 퇴비간으로 보내고, 걸러낸 액체만 솥에 넣어 뭉근히 오래오래 졸였어요. 양이 줄면서 끈기가 생기더니 드디어 조청 완성! 


사실 엿기름을 쓴 게 아니니 조청이라기보다 시럽이라 하는 게 맞겠지요. 맛을 보니 약초 맛이 나요. 요리할 때 물엿 대신 써도 좋겠고, 떡 찍어 먹어도 맛있겠어요. 뜨거운 시럽을 국자로 떠서 소독한 유리병에 나눠 담았습니다. 내버릴 뻔한 효소 찌꺼기로 진한 시럽을 얻으니 아주 뿌듯했어요.  


부패가 생명을 가능케 한다


가을철 수확물의 저장법은 여러 가지예요. 고추나 버섯이나 호박은 바짝 말리고, 토마토나 사과 등은 잼으로 만들고, 오이는 소금물에 삭히거나 식초로 피클을 만들고, 갖가지 과실류는 효소나 술로 발효시킵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풍족할 때 저장했다 부족할 때 꺼내 쓰는 여러 방법을 고안했어요. 건(乾), 염(鹽), 당(糖), 산(酸), 훈연 저장법 등은 그렇게 이어져 내려온 인류의 지혜이지요. 햇살과 바람과 땅이 내어준 먹을거리에 감사하며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이 소박한 저장법은, 내 손으로 거둔 먹을거리를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해 갈무리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었습니다. 


밭에서 나는 토마토가 너무 많을 땐 토마토잼을 만듭니다. 십자로 칼집을 내고 뜨거운 물에 데쳐 껍질을 벗긴 후, 냄비에 설탕과 함께 넣어서 졸여요. 토마토잼은 씹히는 식감도 좋고 맛도 아주 좋아요.


그러나 모든 것을 돈벌이를 위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이와는 차원이 다른 방부 처리를 먹거리에 해대고 있지요. 먹고 건강해지는 ‘식품’이 아니라, 이윤만 남기면 그만인 ‘상품’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 유해한 약품으로 범벅을 해서라도 오래도록 멀쩡해 보이게 하고 오랜 기간 유통되도록 만듭니다.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만 있다면 장기간 썩지 않는 농산물을 만들어내는 일에 죄의식도 없어요. 운반 과정에 수개월이 걸리는 수입 농산물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이 없지요. 세계 각지의 농산물이 우리 가정의 식탁에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고 있지만 그 안전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알 수가 없는 현실이에요.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시간과 함께 모습을 바꾸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발효’와 ‘부패’를 통해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현상은 균의 작용에 의해 일어난다. (...) 살아 있는 온갖 것들의 균형은 이 ‘순환’ 속에서 유지된다. 가끔 환경이 변해 균형을 잃을 때도 순환은 자기 회복력을 작동시켜 균형 잡힌 상태를 되찾게 한다. 그 같은 자연의 균형 속에서는 누군가가 독점하는 일 없이도, 누군가가 혹사당하지 않고도 생물이 각자의 생을 다한다. 부패가 생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 중에서


음식물 쓰레기와 삭힌 닭똥, 흙과 풀, 썩힌 왕겨, 생선 부산물, 마른 낙엽, 한약 효소 찌꺼기, 나뭇재, 조개껍데기를 빻은 석회가루 등을 퇴비간에 넣어 섞어줍니다. 여기서 썩어서 분해된 것들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 새 생명을 키웁니다.


그러니 썩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썩어 없어지지 않으면 새것이 생겨나지도 못하지요. 앞선 존재들이 비켜준 자리에 내가 살듯, 언젠가는 내 자리도 뒤에 오는 삶에게 돌려줘야 해요. 자연스러움이란 그런 것이죠.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 속해 있고, 잠시 기대어 살다가 곧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에겐 지배하고 파괴할 권리가 없어요. 우리가 날린 부메랑은 우리 주변을 해치고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본래 자연은 모든 물질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역할에 망설임이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