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1. 09: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5년 12월호>에 실린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과학저널리즘대학원 연구교수 김영욱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미디어 통해 전염되는 자살
뉴스를 검색해 보니 제목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보도가 제법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적지 않은 기사들이 여전히 제목에 ‘자살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넷 뉴스 이용자는 제목만 보아도 ‘용인 일가족 4명 사망’이 자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23일 저녁 공영 KBS 뉴스 보도는 자막이 “일가족4명 사망…빚 독촉에 동반 자살”이었습니다. 자녀가 포함된 자살 사건을 ‘동반 자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적되어온 잘못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자살에 동의했을 개연성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동반 자살’이라는 틀린 표현 대신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고 보도해 왔다면 그런 사건이 훨씬 줄어들었을지 모릅니다.
기사 제목에 ‘자살’을 포함하지 말라는 ‘언론의 자살보도 기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지 않은 기사들이 제목에 ‘자살’을 사용하고 있었다.
일가족이 사망한 비극적 사건을 놓고 ‘좋은 보도’ 운운하는 것이 비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높은 자살률 때문입니다. 한국은 최근 10년 이상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지키고 있습니다. 2위와 차이도 상당합니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2013년 한국이28.7명, 2위인 헝가리가 19.4명이었습니다. 2014년에는27.3명으로 약간 낮아졌지만, 아직 하향세라고 보기힘듭니다. 둘째, 자살은 전염되며 미디어가 그 매개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모두 자살을 고려하지는 않습니다. 자살 의도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 실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자살보도가 자살을 결심하거나 실행에 옮기게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려움이 없는 사람에게도 언론을 통해 자살이 삶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학습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렇지 않으면 죽지 않을 사람이’ 언론보도로 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언론보도가 자살의 독자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증거는 없고, 그럴 개연성도 약합니다. 그러나 자살보도가 모방 자살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정설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스티븐 스택(Steven Stack)은1967년에서 2009년 사이에 미디어와 모방 자살의관계를 밝힌 학술 연구를 최소 120개 발견했습니다. 한국 연구에서도 신문의 자살보도 건수와 자살자 사이의 상관관계가 확인됐습니다. 한국에서 자살률이 급상승해서 OECD 1위에 올라선 것이 2003년입니다. 그해 12월 창립된 한국자살예방협회가 가장 먼저 시작한 작업 중 하나가 언론보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협회는 2004년 7월 한국기자협회와 공동으로 ‘언론의 자살보도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제목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피할 것, 자살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표현을 삼갈 것, 자살 방법과 장소에 대한 묘사를 피할 것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이와 함께 자살의 부정적 결과를 제시하고 자살 예방과 극복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에 지하철이 도입된 후 자살자가 급증하자 빈대학에서 1987년 ‘자살보도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발표했고 그 이후 지하철 자살자가 급감했습니다. 전체 자살자 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지켜지지 않는 자살보도 권고안
아쉽게도 2004년의 한국의 자살보도 기준은 그런 효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자살률이 줄어들지 않았고 언론보도에도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살보도가 어느 정도의 모방자살을 불러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세계적 사례들이 한국에서 만들어졌습니다. 2008년 10월 배우 최진실의 자살이 대표적입니다. 보도 양이 많았음은 물론이고, 보도 내용(자살 방법, 자살 정당화 혹은 미화, 과도한 애도 등)에서 자살보도 기준이 거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모방 자살로 사망 후 두 달 동안 평소보다 자살자가 1,000여 명이 더 늘었습니다.
이 사건보다 앞서 발생한 안재환의 연탄가스 자살도 많은 모방 자살을 낳았습니다. 2005년 배우 이은주의 자살에서도 언론은 “이동식 옷걸이에 넥타이로목매어 자살”했다면서 자살 방법을 명시했고, “불새되어 날아갔다”는 등 자살을 미화했습니다. 당연히 모방자살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모방 자살은 ‘원래’ 자살할 사람이 언론보도를 계기로 실행에 옮긴 것이지 그로 인해 전체 자살자 수가 증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살자가 순증합니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자살예방센터가 2013년 발표한 ‘자살보도 권고 기준 2.0’.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2013년 보건복지부 산하중앙자살예방센터는 2004년 발표한 권고 기준을 개선한 ‘자살보도 권고 기준 2.0’을마련했습니다. 이 기준은 그해 9월 10일 자살 예방의 날 기념식에서 발표되고 한국기자협회, 한국편집기자협회, 한국여기자협회에 공식적으로 전달됐습니다. 이 기준은 인터넷이나 SNS 등 변화된 미디어 환경을 반영했습니다. 이 기준이 언론뿐만 아니라 “블로그, 인터넷 카페, SNS 등을 통해 사회적 소통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다고 명시했으며, 인터넷과 관련한 규정을 신설했습니다.
그동안 자살보도에서 드러난 문제도 반영됐습니다. ‘사회적 문제 제기를 위한 수단으로 자살보도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예입니다. 왕따를 당한 학생의 자살에 대해 언론이 가해자 엄벌 등을 요구하며 사회문제로 키운 결과 유사한 자살 사건이 발생한 사례에 대한 성찰입니다. 학교 폭력, 개인 빚, 생활고 등의 문제를 자살 사건을 계기로 부각시키는 것이 언론에게는 매우 편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언론이 사회적 문제를 자살 사건을 이용해 감성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심층적 탐사를 통해 체계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기자협회의 갸륵한 노력
‘권고 기준 2.0’으로 한국 언론의 자살보도가 나아졌을까요?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앙자살예방센터의 모니터 결과를 보면 그렇습니다. 이 센터는 주간 단위로 ‘자살 관련 뉴스브리핑’을 하고 있습니다. 뉴스브리핑에 소개된 대부분의 보도는 ‘헤드라인에 자살 단어 사용’ ‘구체적인 자살 장소 및 방법 묘사’라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간혹 전자가 빠진 기사도 있습니다. 적어도 제목에서는 ‘자살’ 대신 ‘사망’ ‘숨진 채 발견’이라고 표현한 기사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함께 주간 브리핑에는 자살 예방과 자살 현황에 대한 기사도 많았습니다. 2015년 10월 12일 자살 예방의 날 기념식에서 보건복지부는 한국기자협회를 자살예방우수기관으로 선정했다. 사실 한국기자협회는 그동안 자살 보도 개선을 위해 그야말로 갸륵한 노력을 해 왔습니다. 2004년 ‘자살보도 가이드라인’ 공표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서 기자 교육을 위해 사건기자를 중심으로 매년 자살보도 관련 세미나를 개최해왔습니다.
협회는 또한 중앙자살예방센터와 함께 매분기 ‘자살 예방 우수 보도’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에 반복해서 ‘자살보도 기준’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자살보도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면 자살보도 기준의 발표나 기자협회의 자살보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소용없는 일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목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 경향이 나타난 것도 적지 않은 성과입니다.
클릭과 트래픽이 생존의 기반이 된 미디어 현실에서 ‘자살’이라는 자극적 단어가 가진 매력을 포기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1980년대 언론사 수가 많지 않던 오스트리아 빈의 목가적 언론 환경에서 통했던 것이 21세기 미디어 전쟁터에서 유효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느리지만, 점차 보다 나은 ‘자살보도 문화’가 형성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베르테르’보다 ‘파파게노’
자살 문제에 주목하고 자살 예방에 도움이 되는 기사가 늘어나는 것도 고무적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디어를 통한 자살의 전염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합니다. 그에 반대되는 효과도 있습니다. 파파게노(Papageno) 효과가 그것이입니. 파파게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는 삶의 위기에서 구체적 자살 계획을 세우지만 소년 3명의 설득으로 다시 삶을 선택한다는 내용에서 따온 것입니다. 삶의 위기나 심리적 질병에서 자살 유혹을 이기고 극복한 사례를 미디어가 제시하면, 자살 위험에 처한 사람이 죽음 외에 다른 해결 방안이 있다고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이 자살 사건을 보도하는 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의무이기도 합니다. 자살 예방 전문가들은 언론이 자살보도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론학자로서 2004년의 보도 기준과 2013년의 ‘권고 기준 2.0’ 작업에 참여해, 전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자살에 대해 보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자살 사건을 보도하는가입니다. 2013년 ‘권고 기준 2.0’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고려대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의 말이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대략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쓴 자살 사건 기사로 누군가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면 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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