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1. 11:3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서울경제신문 디지털미디어부 유병온 기자의 글입니다.
서울경제 ‘썸 신년 기획-이슬 맞고 자는 사람을 생각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지하철역 후미진 곳 한구석에 몸을 구겨 넣은 노숙인들을 지나칠 때면 두 종류의 불편함을 느낀다. 하나는 시각적 불편함. 자기 옷과 몸을 제때 씻지 못하는 이들이 공공장소의 여러무리에 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건 애당초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하나는 도덕적 불편함. 이들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불편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뜻하지 않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노숙인도 사람인데, 처음부터 이들을 다른 시선과 잣대로 바라보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날 불편하게 한다. 노숙인에 대한 관심, 그 시작은 이 불편함에서 비롯됐다.
지난 12월 15일 서울 중구청에서 열린 집회에서 노숙인들이
쪽방촌 주민들의 주거 상실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내 안의 불편함을 ‘뉴스’로 풀 생각을 하다
노숙인(露宿人). 이슬을 맞고 잠을 자는 사람. 이들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가장 큰 특징은 ‘거주의 불안정성’이다. 내 몸을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은 삶은 여러 불편함을 낳는다. 제대로 씻지 못할 테고, 오늘 일의 피로를 푸는일도 쉽지 않을 테다. 오늘의 이런 불편은 내일 할 일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주거 공간의 부재는 한 인간의 삶에 치명적이고 중층적인 상처를 남긴다. 노숙인 문제를 기사로 다뤄봐야겠다고 생각을 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노숙인의 삶과 관련된 기사는 그 숫자로만 본다면 참신함이 떨어지는 소재다. 지나가는 행인이 노숙인에게 자기 옷이나 먹을거리를 건네줬다는 소식이 훈훈한 사연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노숙인에 관련한 정책이나 문제점을 조명한 기사도 부지기수다.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의 ‘뉴스’로서는 그 값어치가 떨어진단 얘기다. 그러나 노숙인 문제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항구적 숙제며 많은 이들에게 여러 고민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결코 외면 받아선 안 되는 ‘뉴스’임에도 자명하다. ‘새로운 뉴스는 아니지만 외면해선 안 되는 뉴스’. 그래서 그 내용과 형식을 다른 노숙인 기사와 비슷하게 가져가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서울시청의 자활지원과. 가장 많은 노숙인을 ‘관리’하는 주무부처의 사람들을 만나면 개괄적인 이해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까 싶었다. 그리고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확실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노숙인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산처럼 수북하고, 할 수 있는 얘기 또한 산더미라는 것을. 노숙인 문제와 관련한 수십 편의 논문과 책 등 관련 자료를 확보・검토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써야 했다.
뒤이어 들른 곳은 ‘홈리스행동’. 이곳을 통해 만난 행동가와 노숙인들의 얘기를 들으며 이번 기사의 한 가르마를 잡았다. 노숙인 문제, 그 해결이 어려운 까닭은 지금의 노숙인 대책·정책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단 노숙인의 현재 상황을 ‘관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자활·재활 시설 등 현재의 대규모 시설을 활용한 ‘집단 관리’방식 아래에서 노숙인들이 탈노숙에 이르는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의 노숙인들이 ‘시설 → 쪽방 → 고시원 → 거리 → 시설’의 회전문 안에서 맴돈다.
매년 동짓날에는 거리에서 외롭게 숨을 거둔 노숙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지난 12월 22일 서울역에서 열린 노숙인 추모제에 마련된 위패들.
“집을 한 채씩 주라니…이게 말이 돼?”
이를 풀기 위한 전문가들의 해법은 명료했다. “집을 한 채씩 주면 노숙인의 숫자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 주거지가 안정적으로 확보되면 단순히 거리에서 잠을 자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건강관리·취업 등 자립을 위해 필요한 발판을 마련하는데에도 수월하다는 것. 실제 주거 지원 대책을 통한 탈노숙 비율은 80%에 이른다. 그러나 내 기획은 이 지점에서 ‘큰 산’을 만난다. “집을 한 채씩 주라니…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놀라운 사실이었다. ‘집을 한 채씩 주는 정책’이 실제로 존재한다!!! 선진국들은 무려 20년 전부터 ‘주거 중심’ 방안, 즉 살 집을 마련해 주는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총 5회에 걸친 이번 시리즈물은 기존 신문기사와는 달리 매회 영상, 카드뉴스
형식을 달리해 눈길을 끌었다. 본 회에서 선 보인 첫 번째 영상화면.
다만 이 해법은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이른바 ‘도덕적 해이’ 논란. 정책 집행엔 도덕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노숙인들에게 집을 주자는 주장은 이런 정당성을 무시한, 무책임한 퍼주기란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결국 노숙인 문제는 그 해법은 명료하나 이를 현실에 적용했을 때 정치적으로 매우 풀기 어려운 사회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정책의 도덕적 원칙을 따르느냐, 효율적 해법을 적용하느냐.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불편함’을 공론화해보는 것으로 기사의 최종 방향이 잡혔다.
여기서 또 다시 조우한 큰 산. 무거운 주제를 따분하게만 다루면 하루에도 수천 개씩 쏟아져 나오는 기사의 산더미 속에 그대로 파묻히고 말 것이다. 형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 사실 이번 기획물과는 별개로 최근 신문업계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게 바로 이 ‘형식’의 문제다. 텍스트를 읽지 않는 시대, 신문을 챙겨보지 않는 시대가 되면서 기존의 기사 작성 방식만을 고수해선 먹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약 7개월 전 회사가 디지털 미디어와 관련한 체제·시스템을 새로이 마련하겠다는 소식에 앞뒤 재지 않고 현재의 부서(디지털미디어부)를 자원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독자들의 변화된 소비 패턴에 맞춰 기사를 작성하는 법을 익히고 싶었고 이 배움과 고민의 결과물을 이번 기획에 녹이고 싶었다.
“인간의 존엄은 최후의 배후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 노숙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름도 없이 죽어간 이들이 ‘무명남’ ‘무명녀’란 위패로 남겨진 현장은
주거지의 부재가 인간에 미칠 수 있는 위협을 상징한다.
서울 광화문역에 마련된 사망노숙인의 위패에 한 참가자가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모습.
하나의 기사를 쪼갰다가 다시 붙이다
‘이슬 맞고 자는 사람을 생각하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번 기획은 예고편을 포함해 총 5회 시리즈로 구성됐다. 기존 신문사의 기획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시리즈가 온전히 ‘텍스트’로만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본 시리즈의 첫 번째 편은 매년 거리에서 외롭게 숨을 거둔 노숙인들을 추모하는 자리,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보호해 달라는 목소리 등을 담아 ‘이 겨울, 노숙인의 긴 밤을 추모하다’라는 영상을 제작했다. 이름도 없이 죽어간 이들이 ‘무명남’ ‘무명녀’란 위패로 남겨진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주거지의 부재가 인간에 미칠 수 있는 위협을 독자들에게 전달해보려 했다.
시리즈 두 번째 편은 카드뉴스. 세 번째는 다시 영상편. 이번 기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접한 책, 말콤 글래드웰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에 소개된 ‘밀리언 달러 머레이-노숙인 문제의 해법’ 편을 소재로 해 영상을 만들었다.
마지막은 종합편. 거주의 불안정성이 야기하는 노숙인들의 실태, 즉 죽음의 공포에서부터 건강의 위협, 범죄로의 노출은 물론 노숙인 문제 해법을 둘러싼 걸림돌 등을 종합 분석해 보되 기존에 활용했던 영상과 카드뉴스의 그래픽을 ‘재활용’했다. ‘그날 읽고 다음날 버려지는’ 신문의 생산·소비 패턴 내지는 도그마를 벗어나 하나의 소스를 쪼갰다가 다시 묶어서 여러 번 써먹는 이른바 ‘원소스 멀티유스(One source-Multi use)’ 방식을 차용해보고자 했다. 이 종합편의 텍스트 길이는 원고지 200자 분량 30매 정도다. ‘텍스트를 읽지 않는 시대’에 6,000자 안에 담긴 메시지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내 나름의 해답은 이랬다. “텍스트가 지겨워질 지점에 영상이나 그림, 그래픽 등을 배치해보자.” 그렇게 많은 것을 준비할 시간이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내 결론은 이랬다. “공들여 만든 것인만큼 하나의 콘텐츠를 여러 번 재활용하자. 자주 많이 팔아먹자.”
노숙인 문제 해결이 어려운 까닭은 지금의 노숙인 대책·정책이 문제를
적극 해결하려고 하기보단 노숙인의 현재 상황을 ‘관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서울 동자동 쪽방촌 모습.
인간의 존엄을 위한 최후의 공간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매년 이날이 되면 그해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들을 추모하는 문화제가 서울역에서 열린다. 살갗을 에는 겨울, 그 긴 밤은 노숙인들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간일 터. 목숨 잃은 노숙인의 추모제를 동짓날로 잡은 이유도 이 때문일 테다. 이번 겨울, ‘이슬 맞고 자는 사람’ 시리즈를 준비한 이유 역시 비슷하다.
최근 계속된 추위로 한강이 얼어붙었다고 한다. 세상 ‘이곳저곳’이 꽁꽁 얼어붙은 이 시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사적 공간을 갖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을 노숙인들이 무사하게 이 엄한 계절을 견뎌내길 바란다.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방송 2016년 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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