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0. 14: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이재원 문화평론가·전 텐아시아 편집장
#지상파 드라마의 시청률 확보 공식
케이블 채널이나 종합편성채널 등 지상파가 아닌 채널의 드라마가 화제성은 물론, 시청률까지 앞서 나가는 현상이 최근 3~4년간 벌어지고 있다. 지상파의 경우 SBS ‘별에서 온 그대’ (2013~2014)가 한류 바람을 다시 몰고 왔지만, 최근 신드롬을 일으키고있는 KBS 2TV ‘태양의 후예’ 이전까지 작품들은 소위 ‘중박’ 정도에 머물 뿐 ‘대박’ 작품은 많지 않았다. 반면 케이블 채널 tvN ‘나인’(2013), ‘미생’(2014), ‘시그널’(2016), OCN ‘나쁜 녀석들’(2014)을 비롯해 JTBC ‘아내의 자격’(2012), ‘송곳’(2015) 등은 착실히 성과를 냈다. 여기에 tvN ‘응답하라’ 시리즈 중 최근작 ‘응답하라 1988’은 케이블 사상 최고 시청률(19.6%)까지 기록했다. 지상파 위주의 드라마 지형도가 바뀌며 드라마 성공의 법칙이 변하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 패러다임에서 드라마의 성공은 시청률로 가늠되어 왔다. 시청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는 것으로 여겨졌고 제작진에게 시청률은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청률이 높아야 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방송 산업의 수익 창출 구조 때문이었다. 광고주들은 전통적으로 시청률을 기준으로 삼아 광고를 편성해왔다. 프로그램 시청률이 높을수록 광고 시청률도 높으며, 프로그램 시청률과 광고 시청률은 여자(성별), 고연령층(연령대), SBS(방송사)가 높게 나타나는 식의 실증 연구들도 이런 믿음을 방증 1해왔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야기
시청률이 높다는 뜻은 다수의 시청자가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의미다. 이를 뒤집어 보면 시청자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수의 취향을 폭넓게 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히게 된다. 시청률에 대한 부담은 시청자가 드라마 속에 감정이입할 대상을 다양하게 배치하기 위한 특유의 관습들을 개발시킨다.
첫째, 멜로 장르와의 융합이다. 인류의 크나큰 공통분모인 사랑은 소설, 시, 영화, 드라마를 불문하고 수많은 작가들의 테제이다. 위험부담이 적으면서도 폭넓은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스릴러를 표방한 작품이 어느 순간 멜로로 변해버려 시청자의 외면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는 ‘미생의 밤’에서 “지상파에서 찾아온 분들은 ‘러브라인이 안 나오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었다”며 지상파 드라마 제작진들의 압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둘째,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가족이 자주 등장한다.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에는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까지 한집에 모여 살거나 갈등하고 화해하며, 주된 촬영 세트는 둥그렇게 둘러앉은 밥상 혹은 한옥의 마당이 된다. ‘김수현표 드라마’도 세대를 넘나들며 각 세대를 대변하는 듯한 대사로 인기를 끌었지만, ‘그래, 그런거야’는 명성에 비해 시청자의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셋째, 소위 ‘막장 드라마’다. 최근 MBC 주말드라마 ‘내 딸 금사월’은 무려 33.6%의 시청률로 종영 했지만 막장 논란은 피해가지 못했다. 막장 드라마와 대가족 드라마의 공통점은 다양한 이야기 구조를 뒤섞어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취한다는 점이다. 출생의 비밀, 재벌 2세, 캔디 혹은 신데렐라 등의 코드는 비록 막장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시청률로 보답받기에 제작진 입장에서 버리기 아까운 카드가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관습들은 제작 관행이 되어 버리고 젊은 PD들이 만들고 싶은 기획안은 ‘너무 대중적이지 않아서’ 빛을 보지 못하곤 한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 전쟁이나 재난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방송사에 영향을 끼치는 주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찌감치 사장되기도 한다.
지상파 방송사의 숫자에 대한 집착은 외주제작 시스템의 맥락에서 봐야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드라마 외주제작 시스템은 미국식과 일본식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지상파 방송국이 외주사에 제작비를 주고 1차 저작권 권리를 가져가는 일본식(코스트플러스 방식)과, 제작비 일부를 주고 1차 방영권 외의 판권은 제작사에 주는 미국식이 섞여 있다. 즉, 지상파 방송국이 외주제작사에 드라마 제작비를 일부 주고 판권의 대부분은 가져간다. 때문에 제작사는 제작비 충당을 위해 해외 선판매나 투자자 유치등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청률과는 또 다른 숫자 싸움이 시작되게 된다. 주연배우를 기용할 때 드라마의 이야기와 어울리는지 여부보다는 투자 유치가 가능한지 여부가 주요 변수로 떠오르게 됐다. 배용준이 1억 원의 출연료를 받은 이후부터 투자를 받아올 능력을 가진 배우에게 그 능력을 출연료로 인정해주는 새로운 관습이 생겨나고, 특정 스타배우가 최고가 개런티를 받으면 다른 스타가 그 가격을 뛰어넘는 가격으로 계약하는 시소 효과를 내며 배우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한류스타를 캐스팅할 경우 해외에서 제작비를 조달할 수 있고 판권을 선판매할 수 있다. 사진을 이용한 상품(굿즈)을 판매하거나 해외 팬미팅 행사 등의 부가적인 사업까지도 가능해 제작사 입장에서는 고액의 개런티도 감수하게 된다. ‘드라마는 망해도 제작진도 배우도 수익은 내는’ 기이한 구조까지 연출해내게 된다.
▲ PPL이 가능한 유형인지도 지상파 드라마의 중요 고려 요인이다.
일부 드라마는 과도한 PPL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경고 처분을 받기도 했다.
PPL이 가능한 이야기 유형인지에 대한 부분도 지상파 드라마의 완성에서 고려할 부분으로 떠오르게 됐다. 과도한 PPL은 드라마의 몰입을 방해하지만 드라마 콘텐츠 안에 녹아들고자 하는 광고주의 요구와 방송사의 필요에 따라 점점 늘고 있다.
#콘텐츠에 집중한 비지상파
지상파 드라마가 성공적인 숫자를 기록해내는 구조를 만들어내는데 치중하고 있는 사이, 케이블과 종합편성채널 등 비지상파는 콘텐츠와 시청자에 집중하고자 했다. 불과 10년여 전만 해도 비지상파 드라마는 비주류였다. 인지도 높은 배우를 출연시키기 위해서는 50~100% 정도 출연료를 올려줘야 했다. 광고주 역시 지상파 위주의 미디어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다. 비지상파와 유사한 소재, 비슷한 이야기 구조, 같은 배우로 승산을 보기는 쉽지 않았기에 이들에게 실험은 어떤 면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케이블 채널에서 먼저 실험대에 올린 것은 소수이지만 타깃이 분명한 취향 장르였다. 2010년 시작된 OCN ‘신의 퀴즈’는 메디컬 범죄물로 미국 드라마를 선호하는 젊은 층을 공략했고, 2014년 시즌4까지 제작됐다. 로맨틱코미디 tvN ‘로맨스가 필요해’도 2011~2014년 시즌 1~3까지 만들어지며 인기를 누렸다. 장르에 충실한 드라마들은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에 익숙한 20~40대 젊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케이블 채널이 상대적으로 심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도 실험을 가능하게 했다.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와 타협하는 지상파 드라마 문법 대신, 취향이 확실한 시청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 드라마 콘텐츠에 충실했다.
소재나 장르 제한에서 자유로우면서도 하고자하는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의 힘에 기대 콘텐츠를 끌고 가는 방식은 ‘마이너하다’는 평 대신 ‘완성도가 높다’는 평을 얻게 된다. ‘미생’의 김원석 PD는 “전형적인 러브라인은 없다”고 윤태호 작가를 설득할 수 있었고, 대한민국에 대지진이 난다는 소재로 지상파에서 기피하는 재난을 다룬 ‘디데이’는 JTBC에 편성될 수 있었다.
SBS는 ‘시그널’의 편성을 논의한바 있지만 장르물은 시청률이 높지 않아 PPL을 받기 쉽지 않다는 판단 아래 이 작품을 포기했다. 시청자들은 이미 채널이 아닌 콘텐츠별로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데 지상파가 여전히 숫자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비지상파의 실험은 방송 요일, 시간대, 러닝타임 등 기존의 지상파 문법을 파괴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전통적으로 미니시리즈를 편성하지 않는 금, 토요일에 드라마를 배치하고, 50분이 아닌 1시간 30분을 한 회분으로 잡았다. 덕분에 작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었고, PD는 디테일한 연출에 공을 들일 수 있었다. 예컨대 김원석 PD는 ‘석테일’ 로 불릴 만큼 영화감독 버금가는 자부심을 갖고 작품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비지상파 드라마가 대세로 떠오르는 핵심적인 이유로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의 힘을 꼽을 수 2있다. 드라마가 드라마 밖에서 시청자들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들로 전유(appropriate)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았고, 이는 시청률 이상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소수에 불과해 보이는 장르물 매니아들은 각자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또 다른 이야기거리들을 쏟아냈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신원호 PD는 전회에 걸치는 세밀한 복선과 연결고리들을 제공했고, 시청자들은 이 부분을 퍼즐 맞추듯 읽어내며 추가적인 즐거움을 공유했다. ‘시그널’에 다뤄진 실제 미제 사건을 시청자들이 함께 정리해 가는 사이트가 등장하고, ‘신의 퀴즈’ 시즌5 제작을 요청하는 청원운동이 만들어지기도 했었다.
#비지상파가 만든 새로운 스토리텔링
젠킨스(Jenkins, 2006)는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이란 스토리텔링의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 구조의 출현이라고 봤다. “발단, 전개, 결말의 단순한 경로를 따르지 않고 서사적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며 복잡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분절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런 분절을 통해 소비자들은 자신만의 시간에 자신만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연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전망했다. 드라마 안의 복잡한 세계가 구축되어 있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드라마 밖에서도 다뤄진다. 새롭게 각광을 받는 드라마들이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방식은 참여 문화에 익숙한 컨버전스 시대의 프로 3듀저(produser)들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드라마국 PD가 아닌 예능 PD 출신이 내놓는 스토리텔링 방식은 기존 드라마 문법에 비해 복합적이다. 과거 특정 시점의 사건들과 주인공의 남편 찾기 등 여러 갈래의 이야기거리를 던져준다.
‘시그널’이 현재의 사건과 과거의 사건, 과거가 변하며 달라지는 현재의 사건 등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이야기 방식을 택한 것도 주연배우의 호연이나 연출자의 역량 이상으로 시청자에게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상파 중심의 패러다임을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드라마는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SM, YG, JYP, FNC 등 연예기획사들은 ‘우리 옆집에 엑소가 산다’ ‘드림나이트’ ‘우리 헤어졌어요’ 등 웹 드라마를 직접 제작하며 자사 스타를 주연으로 내세우고, 해외에 홍보하고 판권을 판매하는 등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 방식의 콘텐츠 기획도 증가하고 있다.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방송 4월호 NO.544,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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