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 09:17ㆍ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이재경,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의 글입니다.
"크롱카이트를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
1968년 2월 27일, 미국 CBS방송의 ‘이브닝뉴스’는 특별 방송을 보도했다.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 앵커가 베트남에 직접 가서 보도한 ‘베트남으로부터의 리포트: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라는 제목의 특별 방송이었다. 통신사 기자에서 전직해 CBS 저녁 뉴스의 앵커가 된 지 6년 만에 처음 시도하는, 크롱카이트의 입김이 강하게 투영된 보도였다. 이 보도 이후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 여론은 완전히 싸늘해졌다. 그만큼 월터 크롱카이트 보도의 영향력이 강력했었다.
크롱카이트 자서전을 보면 이 무렵 베트남 특별 리포트를 취재하는 과정의 고뇌가 잘 정리돼 있다.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과 식사하며 ‘애국심’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딕 샐런트 뉴스 담당 사장과는 방송이 나간 뒤 회사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도 했다. 크롱카이트는 이 보도를 위해 직접 취재팀을 인솔하고 베트남으로 날아가 전황을 파악했다. 크롱카이트는 이례적으로 주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특별 리포트 방송을 하기로 결정했다. 현장에서 취재한 내용에 대한 리포트를 모두 마치고 특별 리포트의 마무리 부분에서 크롱카이트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베트남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지도자들이 견지해온 낙관주의에 실망해왔습니다. 이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해졌습니다. 베트남의 전투 상황은 1교착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한 발짝씩 더 나빠질 때마다 세계는 전대미문의 재앙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거 무수히 거짓으로 판명된 낙관론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패배의 문턱에 있다는 주장은 불합리한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트남에서 우리는 진퇴양난의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보는 것이 만족스럽진 않지만 가장 현실적인 결론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던 미국으로서는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진단이었다. 그래서 이 리포트가 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크롱카이트 리포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이 기자에게 이 전쟁의 가장 이성적인 출구는 협상을 통하는 길밖에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승리자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고 그 목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온 명예로운 미국인으로서 하는 협상의 길입니다.”
데이비드 핼버스텀의 책, ‘군림하는 권력(The Powers That Be)’에 이 상황에 대한 묘사가 제법 길게나온다. “크롱카이트의 리포트는 여론의 균형을 바꿔버렸다. 이 보도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앵커맨에 의해서 종전이 선언된 사례였다.”(514쪽)
크롱카이트 자신은 그 보도의 파장이 그렇게 강렬할 줄 예견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가 애국심을 의심 받으면서까지 이러한 특별 보도를 방송하기로 결정한 배경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철학 때문이었다.“ 우리 방송인들이 이러한 민주적 기본가치에 대해 발언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렇게 할 사람이 없다. 나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특별 보도를 방송해야했다.” 자서전에서 그가 밝힌 방송 결정의 이유다.
꺼져가던 워터게이트에 대한 관심 되살리기도
크롱카이트는 1972년 10월 27일과 28일, 다시 한 번 미국 역사를 바꾸는 특별 리포트를 한다. 이번에는 2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가 주도하던 워터게이트 기사는 1972년 가을쯤 후속 보도가 나오지 않아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가용한 모든 자원과 수단을 동원해이 기사의 불똥이 튀는 걸 막으려 애쓰고 있었다. 기자들의 취재에 협조를 안 하는 것은 물론, 다른 매체가 이 문제를 다루는 것도 최대한 억제하고 있었다. 앵커이면서 보도국장의 직책도 겸해, 뉴스 제작에 관해서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던 크롱카이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백악관이 불법적으로 권력을 사용한 구조적인 권력 남용의 사례라고 판단했다. 불과 2주 뒤에 있을 미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이 특별 리포트 보도를 밀어붙였다.
기본 계획은 이틀에 걸쳐 15분씩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행 상황을 짚어보며 꺼져가는 공중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정했다. 10월 27일 첫 방송이 나가자 닉슨 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백악관 비서실장과 법무장관 등 행정부 실세들이 각 방면으로 압력을 가해왔다. CBS의 윌리엄페일리 회장, 딕 샐런트 사장 등 임원들이 크롱카이트를 찾았다. 요점은 두 번째 방송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줄여 보도하는 쪽으로 타협안을 냈다. 워터게이트 보도 2부는 절반으로 줄여 8분 정도의 리포트로 편집됐다.
이틀에 걸쳐 모두 23분 정도 나간 리포트의 힘은 대단했다. 워터게이트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다른 매체들도 크롱카이트의 리포트를 보며 다시 이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가장 고마움을 크게 느꼈던 매체는 워싱턴포스트였다. 당시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기자를 지휘하던 벤 브래들리 편집인은 크롱카이트가 주도한 이 보도가 하늘의 축복이었다고 뉴스위크 기고(2009.7.16.)에서 회고했다.
“1972년 10월, 크롱카이트는 이틀에 걸쳐 두개의 특별 보도를 워터게이트 사건에 할애했다. 첫날은 14분이었고, 둘째 날은 8분이었다. 내 생각에 둘째 날 보도는 페일리 회장이 크게 축소시켰다. 페일리는 그 기사가 나가는 걸 두려워했다. 크롱카이트가 워터게이트를 다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엄청난 축복이었다. 우리 워싱턴포스트는 그 시점에 그 축복이 절실했다. 우리 매체만으로는 힘이 크게 달렸기 때문이다. … CBS가 워터게이트를 제대로 다루자,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정치권의 러브콜을 거절한 이유
월터 크롱카이트는 1981년, 65세 정년으로 CBS에서 떠난다. 은퇴 무렵이 되자 정치권에서는 그가 축적한 엄청난 대중의 신뢰를 이용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러나 크롱카이트의 답변은 항상 “NO”였다. 역시 자서전에서 그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자신이 정치에 나서게 되면, 그 선택은 자연스레 그가 평생 일했던 기자로서의 일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이 정치를 하기 위해 기자를 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했다. 기자일이 정치적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두 번째 이유는 앞으로도 계속 언론에 종사할 후배 기자들에게 누가 되기 때문이었다. 크롱카이트는 자신이 정계로 가면 시청자들은 방송에 종사하는 모든 후배 기자들을 그러한 색안경을 쓰고 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기자의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 그의 염려였다.
전문직 문화가 다르고, 기자 인사제도도 많이 달라 우리 현실에 그대로 투영할 수는 없지만, 크롱카이트의 확고한 언론 철학은 한국의 정계와 언론인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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