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7. 09:3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장선화 서울경제신문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위원(Ph.D)
[요약] 최근 공허한 사과로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례가 적지 않다. 작게는 드라마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복장으로 등장해 시청자의 반감을 불러 일으킨 연예인의 짤막한 SNS 사과부터 과거 저지른 성추행 사건에 대한 뒤 늦은 목사의 후회와 같은 사과에 이르기까지! 사과란 왜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 2005년 12월 27일 청와대 춘추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해 11월 여의도에서 열린 농민대회에 참가자 두 사람이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해 사망하자 대통령은 “국민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라며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아울러 책임자를 가려내 책임을 물을 것과 피해자에 대한 국가 배상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경찰의 교육을 약속했다. 그는 말미에 힘들게 직무를 수행하는 경찰 관계자의 불만과 우려에 대한 염려와 엄중한 공권력의 책임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이같은 불행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할 것임을 재차 다짐했다. 지난날 대통령의 사과문을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는 정재계 그리고 연예계에 몸담고 있는 사회지도자나 공인의 사과(謝過)가 어떤 의미인지를 되짚어보기 위해서다.
최근 공허한 사과로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례가 적지 않다 1. 작게는 드라마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복장으로 등장해 시청자의 반감을 불러 일으킨 연예인의 짤막한 SNS 사과부터 과거 저지른 성추행 사건에 대한 뒤늦은 목사의 후회와 같은 사과에 이르기까지 가히 전방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키고도 사과 대신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폴더형 인사를 하는 ‘보여주기식’ 사과로 소속된 기관 혹은 기업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도 한다. 2015년 11월 남양유업은 대리점주에 유통기한 만료가 임박한 유제품을 억지로 떠넘기거나 판촉사원의 임금지불 의무를 대리점에 전가해 갑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장관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특혜 비리 의혹이 불거져 나오자 후보자들이 변명으로 일관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언론계는 또 어떤가. 자사의 주필이 호화 외유성 출장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한 증거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언론사는 개인의 일탈로 몰아가기 바빠 보였다. 사회지도층의 이 같은 껍데기뿐인 사과로 빈축을 사면서 대중의 박탈감은 가중되고 있다. 위법을 저지르고도 태연자약하는 모습에 법과 질서의 엄중함과 공정함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사회 지도층이나 공인들의 사과가 이슈로 등장할 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내 뱉은 말에 영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걸 갖고 그러냐?’ 혹은 ‘다 지나간 옛 일인데 뭘 새삼스럽게 끄집어내느냐?’등 속내가 드러난 행동을 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지고 있다.
#진정한 반성과 피해복구 약속 갖춰져야
그렇다면 사과란 왜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과(謝過)의 사전적 의미를 먼저 따져보자. 사과는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피해자에게 사죄를 하고 용서를 빈다는 뜻이 담겨있다.
사건의 정도에 따라 사과의 형식 역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길을 가다 사소하게 부딪칠 경우 ‘미안하다’고 그 자리에서 말하면 사과는 부딪친 사람에게 곧 바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이나 공인이 저지른 범죄 수준의 비리에 대한 사과는 형식이나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져야만 한다. 2
사과의 의미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과거 행동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는 단계이며 두 번째는 과거 자신이 저지른 일이 그릇된 행동이었다고 인정을 하는 단계이며, 세 번째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여기서 잘못이란 사회적인 규범이나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나 언어를 말한다. 사과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자기 반성이다. 즉, 과거의 행동이나 언어의 잘못됨을 인식하고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미래의 개선을 다짐하는 내용이 담겨있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사과(apology)가 학문의 영역에 이르렀다. 경영학·사회과학·언어학 등의 분야에 연구 주제로 자리잡으면서 다양한 연구 성과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경영학과 로이 르위키(Roy J. Lewicki) 교수는 755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두 차례의 실험을 거쳐 사과문에 포함되는 구성요소 6가지에 대한 각각의 효과를 알아냈다. 3
사과문에 포함되는 구성요소 6가지는 아래와 같다.
①후회의 표현(Expression of regret)
②일이 잘못된 경위에 대한 설명(Explanation of what went wrong)
③책임에 대한 인정(Acknowledgment of responsibility)
④뉘우침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f repentance)
⑤피해에 대한 복구 약속(Offer of repair)
⑥용서 호소(Request for forgiveness)
르위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여섯 가지 요소 중 상대방에게 가장 큰 호소력이 있는 것은 ③책임에 대한 인정이다. 사과문에서 자신이 잘못했으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시인하는 대목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⑤피해에 대한 복구를 약속하는 것이다. 사과가 자칫 용서해달라는 말만 늘어놓으면 공허해질 수 있기 때문에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원상복구를 해 주겠다는 실질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약속이 필요하다는 것. 그 밖에 ①②④ 등 3가지 요소는 유사한 수준의 결과를 나타냈으며, 가장 낮은 요소는 ⑥용서 호소로 잘못했으니 한번만 용서해달라는 말로 자칫 구차해보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부득이한 경우 ⑥은 사과문에서 제외를 해도 된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이 연구는 사과를 비즈니스의 협상 과정이라고 보고 그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수를 저지르거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일단 쌍방 간의 신뢰가 무너지기 쉬워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사과는 필수라는 설명이다.
비즈니스에서만 통하는 말은 아니다. 인간관계 형성에 중요한 덕목인 신뢰가 무너지면 그동안 쌓아온 인관관계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만약,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무너진 신뢰를 복구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진정한 사과를 해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진정성 있는 사과는 필요하다.
미국 서던오리건대 인문학부 에드윈 L. 바티스텔라(Edwin L. Battistella) 교수는 그의 저서 ‘공개 사과의 기술’에서 완전한 사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과하는 사람이 수치심을 표현하고 특정한 행동규칙의 위반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외면이나 배척에 공감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또한 잘못된 행위를 명시적으로 부정하고, 그 행위와 이전의 자신을 비판하며 앞으로 바른 행동을 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그리고 속죄하고 배상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을 둘로 분리한 뒤, 잘못을 저지른 과거의 자신을 비판하고 던져버려야 한다.’ 4
사과도 기술이라고 말하는 바티스텔라 교수는 공개적인 사과가 때로는 행위자와 기관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태를 되려 악화하는 불쏘시개로 돌변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사과하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혼이 없는 사과, 사회 기강 무너진다
두 교수의 연구에서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진정성과 책임있는 행동으로 압축된다. 마음(진정성)과 몸(책임있는 행동)이 한결같아야 사과를 했을 때 상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무너지면 서로가 불신에 사로잡혀 언제 어디서 누가 배신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기업이나 사회, 나아가 국가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마음을 한 데 모으기가 쉽지 않다. 법질서 기강도 문란해져 이른바 불안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론적으로는 ‘진정한’ 사과가 이렇게 간단해 보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인색하다. 일각에서는 전통적인 위계질서 탓이라고 한다. 나이 많은 사람에 대한 공경이 사회적 관습으로 내려오고 있어 윗사람이 잘못을 저지를 경우, 사과가 위신 혹은 체통 깎이는 행위로 간주되기에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회지도층이나 공인의 말 한마디가 그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던지는 파급효과는 적지 않다.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 실수 혹은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설상가상 그 행위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구차한 변명 혹은 영혼없는 사과를 일삼는다면, 어찌 사회 구성원들에게 법과 질서를 지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두 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발전을 일궈온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기회의 균등과 공정함이 기본이다. 민주사회 대한민국의 지도층과 공인들의 비리가 잇따르고, 이에 대해 영혼없는 사과를 일삼는다면 그들의 영(令)은 공허해지고, 나라의 기강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영(令)이 서야 나라의 영(令)이 선다.
- 공분 (公憤) : 공중(公衆)이 다 같이 느끼는 분노. ‘대중의 분노’로 순화. [본문으로]
- 2016. 에드윈 L. 바티스텔라, ‘공개 사과의 기술’, 문예출판사. p.48 [본문으로]
- 2016, Lewicki, R.J., Polin, B, Lount Jr, R.B., 'An Exploration of the Structure of Effective Apologies', Negotiation and Conflict Management Research, Vol.9 No.2 pp.177~196. [본문으로]
- 2016. 에드윈 L. 바티스텔라, ‘공개 사과의 기술’, 문예출판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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