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멀리하게 되는 원인은 기자 때문이다?

2011. 5. 4. 13:14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많이 읽든(다독多讀) 잘 읽든(정독精讀) 무엇인가 읽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읽지 않고서는 판단을 한다든가 행동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읽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거의 모든 인간 행위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읽는 행위에 앞서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주 명백하게 그렇습니다. 그것은 제대로 쓰는 행위입니다. 글이 제대로 쓰여야 제대로 읽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비문(非文)과 알아듣기 힘든 암호로 점철된 글을 주고서 “이거 정말 중요한 것이니 잘 읽어보라”고 신신당부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건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읽어봐야 남는 것도 없을 것이구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말 요령부득이거나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글들을 많이 접합니다. 특히 신문에서 그렇습니다. 기자들은 아예 그렇게 글을 쓰도록 훈련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건의 현장에서, 그것도 마감시간에 쫓겨 기사를 쓰는 마당에 문장에 멋을 부린다든가 세부적 표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이지요. '사실 전달의 기사체(이른바 스트레이트 기사)’에 익숙한 한국의 기자들에게 특히 그런 경향이 큽니다.

바로 이 대목에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나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소비하는 요즘 우리는 기사를 읽고 난 뒤 그것이 어느 매체, 어느 기자의 기사인지 기억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99%입니다. 왜냐하면 그저 사실관계를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기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특정 사안에 대해 알고 싶을 경우 이런저런 기사 한두 건을 적당히 선택해서 보면 그만입니다. 다 비슷비슷한데 여러 건 읽어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될수록 독자들은 신문들이 서로서로 비슷하다는 인상을 강화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런 경향이 언론, 특히 종이신문의 ‘자살골’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얘기지요. 인터넷 시대에 뉴스의 소비행태가 바뀔수록 기사를 차별화하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할 터인데 매체들이 그런 노력을 별로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최근에 A신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기자들이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지를 설명하는 기사였습니다. 여기서 ‘소설’은 우리가 기사를 비하해서 지칭하는 표현으로서의 소설이 아니라 정말 문학 장르로서의 소설을 얘기하는 겁니다. 아마 그 기사를 쓴 기자 본인이 소설을 써서 정식 출간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기자는 ‘경험의 다양성’ 등 몇 가지 요인을 설명한 뒤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를 포함해 한국 기자들이 쓴 많지도 않은 장르소설이 과연 그들(외국의 기자 겸 작가)의 소설만큼 풍부한 내용과 극적 긴장감을 갖추고 있는지 따져보면 부끄럽다. 소설은 세상과 접하는 기자의 통찰력과 상상력의 반영이다. 한국처럼 복잡한 사회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쓴 소설은 외국 소설보다 더 기가 막혀야 맞다. 그런데 못 그러고 있으니까.”


저는 이게 ‘기자가 쓴 소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가 쓴 기사’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양보한다 치더라도 적어도 분석 기사와 기자 칼럼에는 정말 통찰력이 가미되고 상상력이 살아 숨쉬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사가 얼마나 있을까요?

또 최근에 인터넷 포털 네이버가 옛날 신문까지 키워드 검색을 확장했다고 해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정말 우연히 1958년도 B신문의 사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제목은 ‘많이 읽고, 많이 읽도록 쓰자’로서 독서주간에 즈음한 사설이었습니다. 제목이 대개 시사하는 바가 있지요?

“우리 국민들이 책읽기를 싫어하는 것은 책을 저술하는 분들에게도 책임의 일반(一半)이 없다 할 수 없을 듯 싶다. 왜? 읽고 싶도록 책을 못 만들었느냐 하는 데 대한 책임은 그 책을 저술한 분들이 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 글을 쉽게, 재미있게 써야 한다는 데 대한 쓰는 분들의 인식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며….”


이 글도 기자 스스로를 겨냥한 것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단행본 작가들을 향해 하는 얘기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얘기일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정말 반세기 동안 한국 신문은 무엇이 얼마나 바뀐 걸까요? 수습 시절부터 기자들은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줄 수 있어야 좋은 기사'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배우지만 실제 그렇게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개중에는 그런 기사가 없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기자들 스스로 그런 기사를 잘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C, D, E신문에 근무하는 옛 동료 또는 후배 기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최근에 본 기사 중에서 매체와 분야를 불문하고 “아, 그렇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라고 무릎을 치게 하는, 그런 통찰력을 제공하는 기사가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아무도 즉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직업적으로 남의 기사를 눈 여겨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러하다면 독자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흔히들 ‘스타기자’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고 얘기합니다. 정보의 홍수와 그것을 소화하기에 급급한 21세기의 정황 속에서 한 매체를 대표하는 간판격의 기자 또는 칼럼니스트가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일 겁니다. 또 시대상황의 대세를 가르고 나가는 논객의 시대가 더 이상 아니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일리 있는 얘기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 뒤의 의미’, ‘의미와 함께 주어지는 재미’는 기자가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런 것들이 없다면 기자는 영원히 남의 일정이나 허덕이며 뒤쫓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터넷 시대일수록 그 의미와 재미를 찾는 노력은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오래되기는 했지만 1980년대 중반 F신문의 기자가 쓴 ‘거리의 편집자들’라는 제목의 칼럼 일부를 소개합니다. 아주 사소한 소재에서 한 시대의 자화상을 찾아내고 당대의 언론상황도 객관화해 낸 수작입니다. 이런 것들을 찾아내고 소개할 때에야 언론은 ‘제 값’을 하면서 독자들에게 “내 기사도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낮 12시쯤의 광화문 지하도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사람, 점심을 먹고 나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 그들 사이를 비집고 하루의 소식을 제공하는 신문들이 채 잉크 냄새를 떨어내지도 못한 채 선을 보인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선한 뉴스가 있는 날이면, 그 신문에 빨간 색깔의 줄들이 어지럽게 쳐져 있다. 신문을 파는 사람들이 손님들의 눈을 끌기 위해 나름대로 새 뉴스의 제목들에 빨간 줄을 그어서 강조한 것이다.

(…) 신문의 편집자들이 그럴 만한 의미와 뉴스성을 감안, 톱이나 중간 톱으로 올린 기사는 외면당한 채, 저 한쪽 구석에 나지막하게 자리잡은 기사들이 재빨리 선택되어 톱기사 이상의 관심사로 변신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신문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의 하나로 가슴이 막히는 어떤 어색함을 느끼곤 했다. 우리는 ‘작은 뉴스’로 취급했던 기사를 저 친구들은 무슨 안목으로 ‘큰 기사’로 판단했을까. (…) 그들이 쳐 놓은 빨간 줄의 기사가 사람들의 눈을 끌고 또 사람들이 그 기사 때문에 신문을 사게 된다면 문제는 그들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신문에 그어진 빨간 줄들이 지니는 또 다른 문제는 (…) 이 사회의 가치(價値)체계의 이원화(二元化) 현상이다. (…) 검은 것에서 흰 것을 찾고, 흰 것에서 검은 것을 찾는 것은 가치 체계의 전도이지, 다양성이 아니다. 특히 거리의 편집자들이 그어 놓은 빨간 줄의 기사가 결코 감각적이거나 센세이셔널한 것이 아니고 사회에 필요한 정보일 때, 거기서 노출되는 가치나 의식 체계의 비뚤어진 전도는 길게 볼 때 나라 전체를 위해 지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우리는 오늘도 거리의 편집자들에게 졌다. 수치감과 창피스러움이 우리의 어깨를 움츠려 들게 하지만 ‘저 친구들 잘도 뽑아낸다’면서 히죽이 웃을 수밖에 없는 마음속에 쓰디쓴 느낌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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