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3만 건으로 기사 쓴 기자, 어떻게?

2012. 5. 22. 15:14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여러분 앞에 대출 관련 문서 3만 건이 있습니다. 부정대출을 밝혀내기 위해서 이 문서들을 모두 정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흰 종이 위에 ‘正’자를 적어가며 하나하나 대조해야 할까요?

 

지난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렸던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기자는 1만 2천 페이지 분량의 자료를 손으로 정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죠. 컴퓨터로  엑셀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자료를 정리할 수 있죠.

 

컴퓨터는 신문에 기회와 가능성을 넓혔습니다. 선진 신문사들은 일찍부터 컴퓨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요. 오늘 <다독다독>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한, CAR기법으로 작성한 기사를 소개할게요.

 

 

자동차? 아니죠! ‘컴퓨터 활용’입니다

 

CAR는 ‘Compute Assisted Reporting’의 약자로, 기자가 컴퓨터를 이용해 정보를 입수하고, 자료를 정리, 분석해 보도하는 기사형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사 작성뿐만 아니라 기사 발굴, 취재-작성-편집 등 취재 보도활동 전반에 걸쳐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CAR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과거 신문기자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했습니다. 사건 현장이나 인물 인터뷰는 물론이고, 도서관이나 관공서를 출입하며 자료를 찾아야 했죠. 그리고 신문사에 돌아와 후다닥 원고지에 기사를 써서 편집부에 넘겨야 했습니다.

컴퓨터는 신문기사의 취재 형태뿐만 아니라 나아가 새로운 기사 형태도 등장시켰습니다. 거리로 나가는 취재 못지않게 ‘컴퓨터 활용 취재’가 중요해졌습니다. 현장에 나가지 않고도 컴퓨터를 활용해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게 되었죠. 시간과 비용이 줄어든 반면 기사의 질은 높아졌죠. 한정된 취재원 대신 ‘데이터’라는 방대한 취재원을 활용할 수 있으니 취재범위도 확장 됐고요.

 

 

 


[CAR에 익숙하지 않은 기자들을 위해 열리는 공개교육 현장]

 

CAR는 특히 탐사보도에 유용합니다. 심층기획 기사의 경우 일반 기사에 비해 장기적이고 방대한 자료를 다뤄야 합니다. 또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정리, 분석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활용이 필수라고 해요.

 

 

교황 저격범, 5분 만에 들통 나다!

 

1981년 5월 13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오픈카를 타고 신도들 사이를 지나가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피격 당했습니다. 저격범 마흐메트 알리 아그카는 현장에서 체포됐죠. 그로부터 5분 뒤, <CBS>방송에서 피격 사실을 알리면서 알리 아그카의 신상과 전과기록을 보도했습니다. 다른 방송사는 상황보도만 하던 시점에 그 이상을 파악한 것이죠.

 

특종은 조사부 기자의 신속한 움직임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이 기자는 ‘렉시스넥시스(http:// www.lexisnexis.com)’ 라는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습니다. 알리 아그카는 범죄를 일으킨 적 있는 전과범이었습니다. 아직 대중에게 컴퓨터가 알려지기 전에, <CBS>는 컴퓨터를 활용해 엄청난 특종을 잡은 셈입니다.

 

 

 

 

[렉시스넥시스 검색 화면]

 

2000년 <AP통신>에 퓰리처상을 안긴 ‘노근리 사건’ 보도도 ‘렉시스넥시스’의 공이 컸습니다. 랜디 허세프트 조사기자가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전쟁범죄 관련기사 및 논문을 입수한 뒤 분석한 결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군요.

 

포스팅 처음에 소개한 ‘대출 문서 3만 건 분석’은 1985년 <프로비던스 저널>의 엘리엇 자스핀 기자가 실제로 한 사례입니다. 자스핀 기자는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활용해 3만 5천 건의 기록을 정리하고 분석했습니다. 이를 통해 ‘로드아일랜드 주택할부 금융공사 부정대출사건’을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는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검찰은 기사를 근거로 25번에 걸쳐 관련자들을 기소했다고 하네요.
 


‘4․3 특별법’을 이끌어 낸 CAR 보도

 

상대적으로 컴퓨터 도입이 늦은 우리나라 언론들도 1990년대 들어 CAR 기법으로 작성한 기사들을 내놓았습니다. 미국과 달리 조사기자가 별도로 없는 상황에서, 취재기자들이 ‘일당백’ 역할을 했죠. 특종보도가 이어졌고, 관련 공직자들의 책임을 묻고, 법률 제정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제주도 지역신문인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 시리즈는 우리나라 최초로 CAR을 활용한 탐사보도이면서 큰 반향을 불러온 작품입니다. <제민일보>는 1만 5천 여 희생자 명단과 6천여 건의 증언 채록 등 방대한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에 입력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얻어낸 다양한 결과들을 기사화해 지역사회는 물론 학계에 반향을 이끌어냈습니다. 결국 1999년 국회에서 ‘4․3특별법’을 제정하게 되었죠.

 

 

 

 

[제민일보 기사와 단행본으로 나온 ‘4.3은 말한다’]

 

1993년 9월 <한겨레>에서 내놓은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분석’도 인상적인 사례입니다. 그 해 2월 김영삼 대통령을 필두로 고위공직자들이 재산을 자진 신고한 내역이 관보에 공개되었습니다. <한겨레> 특별 취재팀은 스프레드시트에 신고 내역을 입력한 뒤, 다각도로 분석하여 재산이 지나치게 많거나 누락시킨 공직자들을 밝혀냈습니다. 충격에 빠진 정부는 비리 공직자들 다수를 물러나게 했습니다.

 

 

 

 

 

2003년 4월 <문화일보>가 보도한 ‘인사逆차별론은 다소 과장’보도는 발 빠른 취재가 특종을 불러온 사례입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가 공직자 인사 과정에서 호남지역 인물들을 역차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상조사를 지시했습니다. 이 소식을 입수한 <문화일보>는 그 날 주요 인물 234명을 선정하여 출신지역, 출신고교, 출신대학을 입력한 뒤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역차별은 사실이 아니란 점을 밝혀냈죠.

 

이 기획을 며칠 전부터 준비했던 <경향신문>은 허탈해했고, <국민일보>는 아예 기획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신문사 입장에서는 뜨거운 경쟁이 신경 쓰이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신선하고 새로운 보도를 접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네요. 컴퓨터와 인간이 결합한 CAR가 앞으로 어떤 새로운 결과물을 내놓을지 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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