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1. 13:41ㆍ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철학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는 독일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지식인으로 꼽히는 한병철 교수. 그의 저작 '피로사회'는 철학서로는 드물게 독일에서만 2~3만부가 팔리고 올해 초에 한국어판이 발매되어 뜨거운 관심을 받는 책입니다. 겉보기에는 작고 얇은 이 책이 참 만만해보이지만 막상 읽을 땐 한장 한장이 가볍게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즉, 책이 절대 쉽지는 않다는 얘기죠. 다독컴플렉스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에게 '책을 읽었다'라는 말은 정말 저자소개부터 맨 끝 페이지까지 읽는다는 뜻이었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또 읽어도 어쩐지 '다 읽었다'라는 말을 쉬이 하지 못하겠더라구요. 두어번 천천히 곱씹어 읽은 후에야 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는 말 처럼 이 책은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지만, 사회에 대해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우울증의 원인을 정말 참신하게 분석했거든요.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 '해야 한다'가 아닌 '할 수 있다'
성과를 내는 것을 강요하는 사회. 쉽게 말하자면 대한민국 20대 청춘들의 스펙경쟁도 성과사회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과사회는 우리에게 정확히 어느 분야의 스펙을 얼마나 쌓아야 100점이 되는 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토익점수가 990점인 사람은 자신의 스펙이 탄탄하다고 안심하고 있을까요? 대외활동을 5개이상 활발히 한 학생은? 봉사활동을 1000시간 넘게 한 학생은? 우리는 열심히 성과를 내는 과정 중에도 계속 불안에 떨고 자신에게 더욱 채찍질을 가해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책의 시선으로 보면 사회는 이런 우리에게 한번도 '너 꼭 그것을 해야해!'가 아니라 '너라면 할 수 있어'라는 부드러운 말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특성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회는 나에게 노력하면 언제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많은 가능성을 열어뒀는데 내가 정신이 해이해서, 내가 노력을 안해서 그 노력을 잡지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역자 후기에 제시된 더 정확한 예를 살펴보면
의무 과목의 축소 및 철폐, 자기 주도 학습의 강조, 학생 객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데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 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절대적인 경쟁'(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요즘 유행이라는 입학사정관제. 수능성적으로만 입학 여부를 결정하던 것에서 벗어나 좀 더 학생들의 가능성을 중점으로 입학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인데 언뜻보면 정말 기회의 폭이 한층 넓어진 것 같고 좀 더 자율적인 것 같지만 실은 우리를 더 무한대의 성과사회로 몰아넣고 있는 것을 느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걸 이해하시고 느끼셨다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50%는 이해 하신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입학사정관제는 어쩌면 수능이라는 별 것 없는 점수가 아니라 네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또다른 성과를 통해 내게 증명해줘. 라는 것이죠. 수능은 500점만점이라는 최고점이 있지만 입학사정관제에서는 만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정상이 없는 산을 계속 올라야만 하는 거죠.
제가 책을 읽으면서 정말 공감했던건 '긍정성의 과잉'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밑에는 그것 중의 한 부분인데
오늘날의 정신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한다.
이 부분을 보고나니 예전에 스치듯 봤던 한 기사가 떠올랐습니다. 그 중 일부만 발췌해봤습니다.
스펙대신 사람을 본다 - 대기업 '열린 채용' 확산
봉사활동 많이 한 대학생, 해군사관학교 출신 여성 장교, 에베레스트山 오른 벤처인…다양한 분야의 경험 더 중시… 고졸 인력 공채는 이미 대세
삼성전자는 최근 청각장애인 국내 1호 박사인 오영준(37)씨를 채용했다. 오씨는 숭실대 미디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삼성전자에서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더 편하게 전자제품을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그는 한 살 때 사고로 청각과 말하기 능력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독학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웠다. 그는 필담(筆談)을 통해 "확고한 신념과 열정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기회는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 : 조선비즈, 스펙 대신 사람을 본다… 대기업 '열린 채용' 확산, 2012. 05. 22] (▶ 전문 보러가기)
기사에서 나온 것 처럼 넌 안 돼, 할 수 없어라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이 긍정성의 과잉이 외려 우리를 우울증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기업들은 더 열린 마음으로 다양성을 보고 우리의 가능성을 평가하겠다고 하지만 실상 취업준비생들은 더 끝이 없는 경쟁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제 단순하게 영어점수를 따는 게 아니라 정말 남들과 다른 나를 표현하기 위해 에베레스트라도 올라가야 할까요? 피로사회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개인에게 성과를 강요하고 재촉하는 주체를 사회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뭐든 할 수 있어"라는 과잉된 긍정성때문에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변해 피로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겠죠.
저를 비롯한 이 시대의 청춘이 안고 있는 고민을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과 신문을 읽어가며 하나하나 분석해보니 그 동안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깨달음이 생겨났는데요. 거대한 사회에서 나의 의지와 사회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읽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입니다. 다독다독 여러분도 자신의 고민을 무조건 내 탓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더 큰 사회적 원인은 무엇일까 책과 신문을 통해 깊이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스펙쌓기에 지쳐가는 우리 청춘에게 작은 위로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다독다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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