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동네 도서관에 책 180권 기증한 이유

2012. 7. 16. 10:48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최근 빽빽하던 책장이 헐렁해졌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10년 가까이 소장하던 분신과 같던 책, 180여권을 도서관에 기증했다. 처음에는 그저 이사준비였다. 하지만 책 정리는 그 이상의 의미였다. 이를테면 언제 썼는지 모를, 나조차 잊고 있었던 내밀한 일기장을 들여다  보는 기분이었다. 



▲기증한 180권의 책을 모아봤다






글자읽기 훈련에서 독서로..


가나다라마바사…. 글자를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독서 인생이 시작됐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완성된 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 7살에 문맹을 탈출한 나는 환희에 젖어 읽을거리를 찾아 헤맸다. 그 무렵의 내가 닿은 곳은 대학생이었던 오빠의 책장이었다. 아무 책이나 빼 들고 글자읽기 훈련을 했다. 못 읽는 글자가 없다는 사실 하나로 세상사의 큰 비밀을 알아차린 것 마냥 의기양양했다. 연륜이 좀 더 쌓이고 단어가 어떤 뜻을 담고 있으며, 문장이 무슨 말을 전한다는 걸 알아차린 다음부터 나는 ‘독서’라는 걸 할 수 있게 됐다. 





세상 속 또 다른 세상, 책


내가 사는 시간과 공간은 유일했다. 내 몸은 언제나 한 시도 시간이 멈추지 않는 현재에 있었다. 하지만 글자로 이루어진 세상의 법칙은 달랐다. 책에서는 과거의 사건도, 미래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었다. 한반도라는 공간도 뛰어넘었고, 톰 아저씨, 로빈슨 크루소,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 낯선 이름의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라 농사짓는 삶이 전부라 여긴 내게 책은 다른 삶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무엇보다 독서는 구구단을 외우고, 청소를 하고,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고단한 현실을 고상하게 도피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책은 사서 읽는 거야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책은 사서 읽는 거야’. 나는 그 말을 ‘애정남’의 조언처럼 깊이 받아들였다. 보고 싶은 책은 대부분 사서 봤고, 부모님 모르게 20권짜리 전집을 덜컥 계약해 분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 (전집보다 부록으로 주던 장난감에 마음이 뺏겼다는 사실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수능 시험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책을 사 봤다. 시작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였다. 원고지 4만장 분량으로 이루어진 21권이 6개월 동안 책장에 꽂혔다. 그 옆으로 또 다른 소설이 자리를 채우고, 인문과학 서적이 놓이고, 사회과학 책이 들어섰다. 10년이 지나자 방안 구석구석이 책장화 됐고, 내가 보유한 장서는 500여권이 되어 있었다. 



▲180권을 기증한 후 책장이 많이 헐렁해졌다





나의 일기장 같은 책들


종이에 글자가 쓰여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어떤 책을 언제 읽느냐는 순전히 마음의 문제였다. 또한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는 지금의 ‘나’를 숨길 수 없이 드러냈다. 책 읽기=소설 읽기로 알고 있던 때 나의 서재엔 소설이 가득했다. ‘토지’와 ‘태백산맥’을 비롯한 대하소설이 있었고, 한 때 마음을 뺏긴 일본소설이 있었고, 김형경과 김애란, 박민규 등 좋아하는 소설가의 전작을 사 모으기도 했다. 나는 책을 통로삼아 잦은 현실도피를 감행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책을 창으로 현실을 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설만 탐닉하던 취향에 변화가 찾아왔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인터뷰어를 꿈꾸던 시절, 나는 전업 인터뷰어 지승호의 책에 흠뻑 빠졌다. 기자를 목표로 공부하던 때 내 책장에는 비판적 지식인의 저서가 늘어만 갔다. 삶이 벽에 부딪친 것 같아 나를 알고 싶어 정신분석 관련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그러다 또 사람들이 어찌 사나 궁금해 소설이나 시를 뒤적였고, 삶의 지평이나 나침반을 찾으려 신화를 공부했다. 이 많은 책들은 늘 동시다발적으로 날 유혹했지만, 언제나 손에 잡히는 책만 읽을 수 있었다.







180권의 공통점은 딱 하나


내가 읽고 도서관에 기증한 180권(숫자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딱 하나, ‘나를 위로했다’는 것이다. 한 번의 독서로 충분한 책이 있었고, 거듭된 책 읽기로도 매력이 닳지 않는 이야기가 있었다. 책마다 수많은 밑줄을 그었고, 그보다 더 깊이 나를 달래준 말들은 노트에 옮겨 적었다. 어떤 책은 읽는 시간보다 문장을 베껴 적는 시간이 더 길었다. 눈으로 글자를 삼키고 손으로 글자를 출력하는 동안 불안하고, 두렵고, 막막하고, 슬프던 마음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기쁨과 경탄, 평온함과 행복감도 마음 한 편에 깃들었다. 그리하여 책장을 덮었을 때의 나는 글자 속 세상이 아닌 살아있는 현실을 직면할 힘을 얻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문구는 위로에도 해당된다. (언제 어느 때건 읽히는 책들은 모두 내게 필요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적확한 시기에 만난 책의 말들을 흡수했고, 이젠 그 책들을 떠나보냈다. 나를 위로했고 이젠 내 손을 떠난 180권. 책이 필요한 누군가를 만나 그를 위로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에 책을 기증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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