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 딸이 엄마의 독립을 도운 이유는

2012. 9. 27. 13:30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지난해 가을 엄마가 암 수술을 받았다. 엄마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난 전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귀띔을 해 준 후에야 엄마 몸속에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음을 알았다. 엄마는 항상 본인의 삶과 내 삶을 일치시키려 했다. 19살 겨울 나는 재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엄마는 공부를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렇게 양 팔이 다 벌려지지도 않는 지하 고시원에서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시험이 끝난 후에야 엄마는 진심을 털어놨다. 자신이 대학을 못 갔기 때문에 나는 성공시키고 싶었다고.






엄마는 나를 통해 배움의 욕구를 충족했다. 내가 사고 싶다는 책은 묻지도 않고 사 주셨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공부일 뿐 아무리 해도 엄마의 욕구를 채우진 못했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지식에 집착했다. 어린 시절 내가 본 엄마는 항상 신문을 읽는 모습이었다. 엄마는 아침에 가게 문을 열고 신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구석구석 읽다 보면 하루가 끝난다. 엄마의 몸은 하루 종일 가게에 있지만 엄마의 머릿속은 신문을 통해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학력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틀렸다. 시작은 콤플렉스 때문이었을지 몰라도 신문을 통해 온 세상을 알게 된 엄마는 어느 대졸자 못지않은 지식인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입원해 있던 열흘 동안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학 생활부터 특이한 손님들 얘기까지. 우리의 대화 주제는 일상생활에서 그치지 않았다. 병문안을 왔던 룸메이트는 우리 대화를 듣고 놀랐다고 한다. 의약품 리베이트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부모님과 그런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다며 우리를 부러워했다.


나는 서울에, 엄마는 지방에 있지만 신문이 우리의 대화를 이어 준다. 우리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 것은 신문을 통해 함께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더 이상 나를 통해서 지식의 욕구를 충족하지 않아도 될 만큼 머릿속이 풍부해졌다. 이제 엄마의 학력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엄마는 신문을 통해 많은 세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다리를 얻었다.


엄마의 성장을 느낀 순간 엄마의 정신적 독립을 돕고 싶었다. 엄마는 그동안 배움을 핑계로 본인과 나를 동일시해 왔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아니고, 엄마도 내가 아니다. 엄마에게 선언했다. 정신적으로 나에게서 독립해 달라고. 욕을 들을 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엄마의 인생을 찾기 위해서. 






곧이어 엄마 인생 찾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신춘문예 당선을 꿈꿨던 엄마에게 공책을 선물했다. 모든 글쓰기는 기록에서 시작한다고. 그날 이후 엄마는 신문에서 봤던 세상 이야기, 그 이야기를 통해 느낀 감정 등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있다. 요즘은 매일 엄마에게 전화해 확인한다. “오늘은 뭐 썼어?” 엄마의 지식 독립을 응원하고 싶다. 신문이 엄마의 독립을 도와줄 것이다.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2012년 신문논술대회 수상작 모음집>중 일반부 동상 수상작 오진주 님의 ‘엄마의 독립’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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