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5. 10:12ㆍ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난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소년 가장이 됐다. 늦둥이 외아들로 아버지가 노쇠하셨기 때문이다. 나도 역시 허약한 데다 농토도 없이 농촌에 사는 건 너무 희망이 없어 혼자 도시로 나왔다. 두어 해 여기저기 헤매며 월급도 제대로 못 받다가 용케도 ○○일보 대구지사에 취직했다. 일요일, 공휴일도 없이 새벽 네 시에 일어나 20여 분 달음박질로 출근하는 게 신이 났다. 서울에서 열차 편으로 온 신문을 배부하고 나면 여유 시간이 생겨 열심히 신문을 읽었다. 50년대는 4면뿐이라 여러 신문을 다 읽었다. 한자가 대부분인 사설과 평론 등도 읽을 수 있었던 건 집에서 아버지한테 ‘명심보감’을 배운 덕분이었다.
4, 5년 꾸준히 읽다 보니 ‘이건 이치에 맞다, 저건 안 맞다’는 판단력이 길러졌고, 글 쓰는 요령도 조금씩 터득했다. ‘나도 글을 써 봐야지’ 하는 욕심이 생겼다. 여러 차례 신문에 투고한 끝에 드디어 내 글이 이름과 함께 실렸다. 큰 벼슬이나 한 것처럼 뿌듯했다. 더욱 용기를 내어 투고를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레 글쓰기 실력도 늘어 자주 실리게 되었다. 이토록 좋은 선생님인 신문을 가족 모두가 읽어야지 싶어 어린이 신문을 받기로 했다. 책이 귀했던 때라 재미있게 읽었다. 그 덕분에 네 아이 모두 글쓰기를 잘했다. 각자 하고픈 말을 글로 써서 가족 신문도 만들었다. 이렇게 십수 년 이어온 게 표현력 향상은 물론 바른 성격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출처-서울신문]
1971년 어느 신문사에서 ‘생활합리화 수기 공모’를 하는 데 응모하여 가작에 입선됐다. 신문 한 면을 거의 차지한 글과 사진이 나온 걸 보니 마치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모를 쓴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내용이 내가 실제 살아온 이야기라 더욱 흐뭇했다.
1978년 추석 날 아이들 책상에 고등학교 일학년 국어 교과서가 있기에 무심코 펼쳐 보다가 깜짝 놀랐다. ‘태음력이 농사력에 편리하다’는 것이다. 이건 큰 잘못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입춘, 하지, 동지 등 24절기를 음력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이런 엉터리 교육 때문이었다. 당장 문교부에 편지를 보내고 신문에도 투고를 했다. 문교부는 잘못을 인정하면서 바로잡겠다고 하더니 2년 뒤 그 부분을 삭제한 책이 나왔다.
난 이렇게 신문으로 공부를 했고, 또 신문을 통해 삶의 보람을 느끼며 살아간다. 정상 교육을 받지 못한 내가 만일 이 신문을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무지렁이로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그 폐단은 아이들에게도 크게 미쳤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문은 참 좋은 선생님이다. 정확하고 빠른 소식뿐만 아니라 세계의 석학들이 날마다 집으로 찾아와 삶의 지혜를 골고루 들려주니 이보다 더 좋은 선생님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나는 비록 여든이 다 됐지만 죽는 날까지 이 선생님만은 항상 가까이 모시고 잘 따르며 살아갈 것이다.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2012년 신문논술대회 수상작 모음집>중 일반부 동상 수상작 곽종상 님의 ‘참 좋은 선생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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