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스크랩을 통해 중학생이 본 사회의 불편한 진실

2013. 8. 30. 14:13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지난 7월 여름휴가를 맞아 할머니 댁에서 친척들을 뵙고 서울로 오던 길이었다. 늘 그래 왔듯이 기차에 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요깃거리를 사려던 참에 전에는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신문 가판대가 난데없이 나타나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께서는 말없이 ‘한겨레’와 ‘조선일보’를 한 부씩 사 주셨다. 신문과 나는 그렇게 우연히 만났다. 운명적인 만남이란 게 으레 그렇듯이.


식구들이 기차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순백의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드넓은 벌판 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던 그 겨울의 첫눈 오던 날처럼 한창 무르익은 여름의 기차 속에서 난 신문에 빠져 회색빛 지면 위로 과감하게 형광펜을 그어 댔다. ‘사그락 사그락.’ 신문을 넘기는 소리는 그리 경쾌할 수 없었다. 그때는 아마도 신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이나 지식보다는 신문을 읽는 그 행위 자체를 사랑한 것 같다. 말 그대로 신문은 나에게 ‘멋진 신세계’였다.





딸이 신문을 보는 게 기특하셨는지 아버지께서는 그날 이후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4부의 신문을 하루도 빠짐없이 사 오셨다. 내 스크랩북도 이맘때쯤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스크랩한 신문 기사는 “폭력의 민영화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칼럼이었는데, 폭력의 민영화로 물리력 독점의 정당성을 상실한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함으로써 영토 문제를 부각시키는 사이 국가의 보호영역 바깥으로 내몰린 여의도의 한 비정규직 회사원이 그 분노를 칼부림 사건으로 표출하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그 칼럼은 엇비슷한 시간대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한 화폭에 절묘하게 담아내는 과정을 통해 한 사회의 모든 사건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촘촘한 그물망처럼 얽히고설킨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때부터 사회는 나에게 단순히 공동생활을 꾸려 나가는 집단보다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 칼럼은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약(弱)자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였다는 점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칼럼이 내 스크랩의 시작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도 내 스크랩북은 남들보다 조금 더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삶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난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을 스스로 불살라 버린 전태일의 존재를 늦게나마 알게 되었고, 도립병원에서 내쫓겨 아픈 몸을 이끌고 무작정 떠나야 하는 가난한 환자들, 그리고 비인간적인 입시제도에 의해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한 고등학생 등이 나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차츰차츰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고통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한 내 자신이 때로는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은 이유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신문은 더이상 디스토피아, 부정적인 측면이 극대화된 암울한 현대의 자화상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도움닫기로 느껴졌다. 





난 매일매일 신문을 읽으며 다짐한다. 내가 무엇이 되어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삶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운 이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언제나 진실은 불편하고, 현실은 쓰며, 성장은 아프고, 욕망은 필연적이리라.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우리들 곁에서 항상 ‘사그락사그락’거리는 멋진 신세계, 바로 ‘신문’이 불편한 진실을 향한 우리의 표류를 결코 외롭지 않게 해 줄 것이라고.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2013년 신문논술대회 수상작> 중 중등부 은상 이예진님의  '사그락사그락거리는 우리들의 멋진 신세계'를 옮겨온 것입니다.



ⓒ 다독다독


<2013년 신문논술대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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