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역사 왜곡인가 아니면 노이즈 마케팅인가?

2013. 11. 5. 10:32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지난주부터 블록버스터급 드라마가 방영중입니다. 블록버스터란 영화계에서 큰 흥행 수입을 위해 엄청나게 돈을 들여 만든 대작을 뜻하는 말인데요. 이제는 영화 스크린만이 아닌 안방극장에서도 대작을 접할 수 있게 되었네요. 바로 고려판 ‘신데렐라’라고 불리는 ‘기황후’를 통해서입니다.




[출처 - MBC]


실존인물인 ‘기황후’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고려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원나라 황후로 등극하게 됩니다. 드라마는 그녀가 공녀에서 황후가 되기까지의 모습을 담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생몰 연도조차 정확한 사료가 없다는 것. 여기서부터 이 드라마의 논란이 시작됩니다. 


드라마적 요소가 가미될 수밖에 없는 사극은 늘 논란의 대상입니다. ‘기황후’도 마찬가지인데요. 정보가 부족한 ‘기황후’는 방영 전부터 역사 왜곡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논란이 나왔습니다.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인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지만, 기황후의 정치적 영향력을 등에 업은 외척 세력이 고려에서 반란을 도모하는 등 고려 말의 혼탁한 시기를 더욱 어지럽게 했다는 평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기황후의 상대역으로 그려진 가상의 왕 왕유를 내세워 초반부터 우려가 컸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볼거리와 빠른 전개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1 ‧ 2회 모두 두 자릿수 시청률 몰이에 들어갔습니다.



공녀가 되지 않기 위해 남장하고 무술을 연마한 기승냥(하지원)이 친원세력의 소금 밀거래를 조사 중이던 세자 왕유, 고려 대청도에 유배 온 원의 세자 타환과 차례로 인연을 맺는 내용이 숨가쁘게 전개되며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방송 전 제기됐던 논란이 오히려 시청자에게 궁금증을 유발, 드라마가 빠르게 안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MBC 관계자는 “제작 초기 단계부터 논란이 있어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 같다. 장영철, 정경순 작가의 대본이 워낙 탄탄해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하지원 주진모 씨를 비롯해 모든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돼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50부를 끌고 가면서 논란은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하는 부분이지만, 작가분들이 명뿐만 아니라 암도 조명할 예정이기 때문에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포츠 서울 2013-10-31



‘기황후’는 방송 시작 전 ‘이 드라마는 고려 말,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의 이야기를 모티프(Motif)로 했으며 일부 가상의 인물과 허구의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실제 역사와 다름을 밝혀드립니다’라는 자막을 삽입하며 팩션(faction)임을 밝혔습니다. 제작발표회에서도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70% 이상이 허구의 인물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여기서 문제는 드라마가 허구의 인물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70%가 허구라고 해서 이미 지난 역사적 사실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30%의 실존인물들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기에 ‘기황후’가 ‘이 인물은 왕유다’라고 아무리 우겨도 시청자들 입장에서 왕유는 충혜왕일 뿐이다. 


이렇게 새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역사에 매국노로 남았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상, ‘기황후’는 고려인 출신이지만 원나라의 황후가 되어 고려를 핍박한 기황후와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폭군 충혜황을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드라마일 뿐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루는 소재를 떼어놓고 본다면, 현재 2회까지 방영된 ‘기황후’는 충분히 흥미로운 드라마이다. 화려한 스케일과 연출, 배우들의 열연, 빠른 전개로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이렇게 드라마의 연출이 뛰어나 시청자들이 몰입할수록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는 커진다. ‘기황후’속 인물들과 상황에 몰입하여 감정적으로 동화되고 처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 인물들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는 것에 이어지기도 한다.


제작진은 ‘기황후’의 후반부 기황후의 악행에 대해서 다루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시청자들이 기황후라는 캐릭터에 몰입되어 있는 이상 그녀의 악행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연결되며 어느 정도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해볼 수 있다.


무비조이 2013-10-31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시청률을 잘 나오게 하기 위해 노이즈 마케팅을 한 덕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요.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주인공이 직접 입을 열기도 했습니다.




[출처 - 서울신문]



기황후의 주인공인 주진모는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 바엔 차라리 다큐를 찍지 왜 드라마를 찍느냐는 애기를 팀과 나눈 적이 있다.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는 드라마 내에서 다뤄지지 않을 것이다. 캐릭터에만 충실하겠다"라는 의견을 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냥 시청률만 잘 나오면 되지 왜 따지냐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 다큐이고,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만들지 않는 것이 드라마라면 드라마는 역사를 다루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예 모두 가상의 인물로 두고 하면 될 것을 왜 실존 인물들을, 그것도 역사적으로 악행을 일삼은 사람들을 미화시켜서 영웅으로 그리려 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단 하나. 시청률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노이즈 마케팅으로 시청률을 견인해보자는 것이 기황후가 소재가 된 이유여야만 납득이 간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기황후는 불의 여신 정이가 9%대로 저조한 시청률을 냈지만 이어서 바로 11%, 13%의 시청률을 내며 상승세에 탔기 때문이다. 50부작이기에 초반 시청률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경쟁 드라마를 두개나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초반에 시청률을 잡아 놓지 못한다면 쉽지 않은 레이스가 될 것이기 때문에 기황후의 노이즈 마케팅은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다. 


미디어어스 2013-10-31



허구의 이야기라는 자막을 잠깐 삽입하는 것만으로는 ‘기황후’가 역사 왜곡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전반적인 시각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기록에 ‘기황후’는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로 명확하게 기록이 남아있고 어떤 경우에도 미화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매국노를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꾼 역사의 왜곡은 이해할 수가 없죠. 고려를 침공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인 원의 황후 ‘기황후’를 인생 극복의 관점에서 쓴 드라마가 성공한다면, 그 드라마를 본 역사적 인식이 약한 사람들에게 기황후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요.




[출처 - MBC]



대중문화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국어국문학)는 “1·2부를 보면 기황후를 여전사로 만들고 있는데, 회가 거듭될수록 이야기가 내적인 설득력을 얻어 결국 역사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는 기황후에 시청자가 공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이어 역사적 배경과 인물을 드라마 소재로 가져올 때는 작가 의식과 역사 의식이 필요할 텐데, 그런 부분이 전제되지 않은 게 심각해 보인다. 시청자가 드라마에 몰입하면서 역사 왜곡이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우려했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 또한 “1·2부만 보면 판타지 시대극을 보는 느낌인데, 실존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논란은 감춰지고 있어 ‘역사가 이렇게 탈색돼도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한겨레 2013-10-30



결국 ‘기황후’라는 인물의 설정 때문에 이 드라마는 50부작이 끝날 때까지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지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기 때문에 더 위험한 것인데요. 드라마는 재미가 있으니 내용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그 내용이 더 쉽게 이해가 되고 기억에 오래 남기 때문이죠. 세종대왕 이야기보다 ‘뿌리 깊은 나무’가 더 기억에 남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기황후’ 앞에는 역사 왜곡 논란을 품고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는 엄청난 숙제가 놓여 있는데요. 숙제의 본질은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느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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