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8. 09:56ㆍ다독다독, 다시보기/현장소식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들이 건축학 과제를 위해 함께 걸었던 한옥 골목을 기억하시나요? 이 소박한 한옥들이 즐비한 곳이 바로 ‘서촌’인데요.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지로 자주 등장하는 서촌은 예스러운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매력적인 동네입니다.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컬어 ‘서촌’이라는 별칭이 지어졌다고 하는데요. 정확하게 말하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지칭하는 곳이죠. 단풍이 지기 전에 떠나는 가을 서촌 나들이, ‘다독다독’과 함께 출발해 보실까요?
골목골목 서촌나들이 : 서울의 옛 얼굴과 마주하기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의 고즈넉한 풍경에서부터 서촌여행은 시작됩니다. ‘가을을 맞이한다’는 이름의 의미와 같이 영추문은 가을에 한껏 포개진 채 고궁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영추문 돌담길을 지나 한 여관과 마주쳤는데요.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통의동 보안여관’은 과거에 이중섭, 서정주 등 걸출한 예술인들이 머물렀던 문화공간이라고 합니다. 1930년대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던 ‘시인부락’이라는 ‘문학동인지’도 이곳에서 탄생했는데요. 세워진지 80년이 지난 지금은 아쉽게도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 이전의 활기찬 모습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독립출판물과 다양한 수공예작품을 위탁 판매하는 중고서점 ‘가가린’은 일반적인 동네 헌책방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좁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 그리고 쉽게 볼 수 없는 출판물들이 내뿜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작은 창작물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겠지요.
‘가가린’ 맞은편 정문에는 ‘FREE GALLERY, SELF CAFE’라는 독특한 슬로건의 카페가 있었는데요. 바로 서촌 한옥마을의 주인 없는 카페 ‘브라더코’입니다. 빨간 우체통에 문화비 5000원을 넣기만 하면 카페의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하네요. 빔 프로젝터에서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스피커에서는 음표 가득한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또한 주인도, 아르바이트생도 없어서 부담 없이 스스로 커피를 내려 마시며, 아기자기한 내부를 즐길 수 있답니다. 무인카페라고 해서 우체통에 문화비를 내지 않고 즐기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처음 만난 서촌은 길 찾기가 그리 쉬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의 볼거리가 주로 골목 사이사이에 몰려있기 때문인데요. 오밀조밀 모여 있던 갤러리들을 뒤로하고 길을 걷다보니 서촌과는 대조적인 모습의 통인시장에 들어섰습니다. 전통적인 재래시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는데요. 맛있는 분식집과 반찬가게, 잡화상이 오목조목 모여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서촌은 궁에 물자를 댔던 서민문화의 흔적이 골목골목 남아있어 옆 마을 북촌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하는데요. 오밀조밀한 서촌의 골목을 걷다 보니 마치 서울의 옛 얼굴과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흑백앨범을 보는 것처럼 말이지요.
큰 거리 쪽 입구에서 통인시장을 통과하자 동네의 명물이자 청와대 직원들의 단골 빵집으로 유명한 ‘효자베이커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가게 밖으로 새어나오는 그 달콤 고소한 빵 냄새에 반해, 이 냄새를 맡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는데요. 프랜차이즈 빵집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요즘, 효자 베이커리의 빵 냄새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리운 향이기에, 오랜 세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찾는 것 같았습니다.
예술가들의 마을
여러 공방들과 카페들이 즐비한 길을 좀 더 걸었더니 인왕산 계곡을 찾아가는 길에 예기치 않은 선물처럼 한 가옥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사진 속 ‘박노수 가옥’이었는데요. 화가였던 그의 집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요. 옛날부터 서촌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현재 옥인동 군인아파트가 된 지역에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라는 집이 있었고 또, 지금은 밑동만 남은 ‘통의동 35번지 백송’터가 걸작 <세한도>를 남긴 추사 김정희가 태어난 곳이라고 합니다. <오감도>에서 막다른 골목을 언급했던 모던보이 이상도 서촌에서 자랐지요. 그 맥을 잇듯 지금도 박물관이나 갤러리들, 그리고 독특한 가게들로 젊은 예술의 기운이 여전히 서촌에 흐르고 있습니다.
오르막길을 쭉 올라가 도착한 인왕산 수성동 계곡은 서울의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었는데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겹쳐져 있는 묘한 풍경이 보였습니다. 거기에 인왕산의 잘 정돈된 소나무와 계곡을 바라보고 있자니,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시를 주고받는 모습이 절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상쾌한 공기의 인왕산을 내려와 다시 서촌 골목에 들어서면 대오서점을 마주할 수 있는데요. 무려 60년 이상이나 골목대장처럼 이 동네를 지키고 있는 가게라고 합니다. 최근 드라마 <상어>의 촬영지로 등장해 일반인들에게까지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인테리어에 손을 대지 않아 몇 십 년 전의 교과서나 소설책이 꽂힌 책장은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습니다. 추억 속 헌책의 냄새를 풍기며 고즈넉한 서촌의 분위기를 집약해놓은 듯 했지요. 간판에 벗겨진 페인트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서촌이라는 동네 전체에서 느껴지는 예스런 정취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점 바로 옆에 위치한 ‘땡모빤’ 이라는 이름의 태국식 과일주스를 파는 가게도 있었습니다. 인왕산 산책에 목이 말랐다면 이곳에 들러 상큼한 음료수 한 잔 하고 가는 것 도 좋겠지요?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동네
첨단도시 서울에서, 서촌만큼은 더디게 시간이 흘러가는 듯 했는데요. 청와대와 가까워 개발이 제한돼 있어, 조선시대의 지도와 현재 골목들의 위치가 같을 정도라고 합니다. 서촌 토박이가 소개하는 동네 가이드, <서촌 방향>의 저자 설진우 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서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는데요.
“서촌은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 누가 와도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에요. 우리 동네의 과거, 우리 동네의 현재를 맞닥뜨리는 거죠. 서울 사람들은 고향이 없다고 하잖아요. 말하자면 이곳이 서울 사람들의 고향인 셈이죠.”
완연한 가을, 도시의 화려함에 지칠 때 서촌에 들러 잊었던 그리움을 만나고 돌아오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소중한 이와 함께하면 더 행복할 그곳. 서촌의 고즈넉함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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