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생각하는 행복, 과학으로 인문학을 말하다

2013.12.09 13:02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과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복잡한 수학 공식이나 어질어질하게 펼쳐진 실험도구들을 금방 생각하실 텐데요. 과학은 일반 사람들에게 멀거나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철학이나 정치학 책도 아닌데, 과학책에서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요? <과학자처럼 사고하기>(이루)란 책은 37명의 과학자를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는데, 빛나는 통찰이 적지 않습니다.




[출처 - 교보문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스스로 속물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는 준엄한 종교인들도 있을 테다.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인 대니얼 길버트는 두 대답 모두 ‘틀렸다’고 말한다. “빈곤층에서 중산층이 될 때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어요. 다만 돈과 행복은 어떤 단계에서 평형이 이뤄집니다. 2004년에 그 지점은 연수입 5만 달러 정도입니다. 처음 5만 달러를 벌 때 사람들은 많은 행복을 살 수 있지만, 그 후에 번 수백만 달러로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경향신문 2012-01-28] 10만달러와 두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나눠야 행복할까



‘행복’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과학자들은 명쾌하게 정리해 내는 것 같습니다. 단순합니다. 분명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한 빈곤층들을 생각해 보면,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건 위험해 보입니다. 반면 책은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도 더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없을 때 몹시 낙심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면서 “행복의 가장 정확한 지표 가운데 하나는 한 사람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질”이라고 합니다. 결국 “부를 이용해 사회적 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음으로서 행복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들 그렇게 사시나요? “연수입이 5만 달러 됐으니 이걸로 충분해. 하루의 반만 일하고 남은 시간은 가족과 보내야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많은 시간을 일하기로 소문난 한국에서는요. 과학이 말하는 건 분명한데,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또 어렵게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그렇습니다.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만약 부와 인구 분배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절대자가 있고 만약 그가 국민들의 행복을 최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사람들에게 행복으로 전환할 수 있는 부의 최대량 이상으로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 10만 달러와 두 사람만이 존재한다면, 각자에게 5만 달러를 주는 편이 9만 달러, 1만 달러로 나눠 주는 것보다 더 많은 행복,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정치가 아니라 오직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죽을 때까지 고르게 박동하는 심장에서도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생 30억 번 정도 박동하는 동안, 심장은 어떻게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는 ‘기적’을 연출할까요? 심장박동을 만들어내는 건 우리 몸의 속도 조절 세포입니다. 만약 이 세포가 한 개였다면 우리는 그 세포의 기능이 저하되고 소멸됨에 따라 함께 죽음을 맞이했을 겁니다. 자연은 우리를 그렇게 설계하지 않았습니다. 심장박동에 관계된 세포는 약 1만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중에 ‘대장’은 없습니다. 이 1만 개의 세포들은 서로 지속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빠를 때는 느리게, 느릴 때는 빠르게 가도록 조절한다고 합니다. 만약 그 중 1개가 죽더라도 나머지 9999개가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독재’보다는 ‘민주’가,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왼쪽 가슴에 손을 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과학은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만약 우리가 과학이 들려주는 진리에 좀 더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요? <아인슈타인에게 묻다>(선)라는 책을 보면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실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우주적 종교’라는 걸 꿈꿨는데요. 길고 흰 수염을 기른 인자한 표정의 신을 떠올리며 숭배하는 게 아니라 전 우주의 근원적 원리를 이해하고 그에 감화 받는 종교입니다.




[출처 - 교보문고]



“참다운 과학자는 우주의 신비한 장막을 걷어치움으로써, 사람들은 우주를 완전한 조화로 유지하는 훌륭한 법칙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기 시작한다네. 인간의 야망과 음모, 그리고 이기주의와 함께 그 존재의 작음을 알게 되지. 이것이 우주적 종교의 싹틈이지.” 이 같은 인식은 세계가 곧 신이라고 생각했던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닮아 있다. 그리고 상대성 원리를 통해 ‘우주가 잉태하고 있는 하모니’를 알고자 했던 그의 과학적 열정과도 닿아 있다. 아인슈타인은 “젊은이들이 과학 정신을 지닌 우주적 종교의 신도가 되었을 때, 평화의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리게 된다”고 말한다.


[경향신문 2013-03-16] “과학정신 지닌 우주적 종교 창설해야 인류평화”… 아인슈타인의 통찰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과학이란 세상의 원리를 궁금해 하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 진리를 좀 더 깊이 호흡해본다면 우리는 좀 더 겸손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스티븐 제이 굴드는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잘못이며 역사상 실제로 저질러온 일은 모든 인간이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류끼리는 정말 작은 유전자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그 알량한 ‘차이’를 토대로 자기 집단이 우월하다며 인종차별과 학살을 자행해 왔다는 겁니다.


물론 안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두뇌는 “진실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니까요. 그래서 “인간의 진화는 진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회의 섞인 말도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만일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인류가 새로 한 번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소수만 살아남을 것이고, 4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곤봉으로 싸워야 할 것”이라면서 “사람은 사회악을 극복할 만한 총명함을 아직 잃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인류를 낙관적으로 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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