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7. 11:03ㆍ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중앙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기사들은 대체로 실명 보도였습니다. 사건 당사자가 공인이든, 일반인이든 실명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었죠. 어쩌다가 한 번씩 ‘김모 군’ ‘이모 양’ 식으로 익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미성년자였습니다. 실명 보도여야 사실 전달에 충실한 기사로 인식되었죠.
이러한 실명 보도 방식이 1990년대 중반부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김모 군’ ‘이모 양’ 식의 표현이 일반인에게도 사용되기 시작했죠. 이즈음 언론의 실명 보도 관행이 법원에서 재판으로 다루어지고 있었고, 아래 판결이 언론의 기사쓰기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2000년대 들어 익명 보도의 원칙은 미담 기사에서도 논의되었습니다. 한 대학병원에 거액의 재산을 기부한 당사자가 자신의 신원 공개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중앙일간지에서 그 신원을 공개했죠. 이 보도는 범죄보도에서 발전된 ‘익명 보도의 원칙’이 일반 기사에까지 확대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익명 보도의 원칙을 조금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언론은 무엇을 알려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익명 보도는 왜 필요할까요?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익명 보도는 명예훼손과 직접적인 관련되어 법적 문제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서 필요합니다. 최근 들어 부상하고 있는 초상권이나 성명권 등 인격권 문제와도 관련이 깊기 때문인데요. 사람의 얼굴이나 용모, 이름, 신체적 특징 등은 모두 개인의 인격적 사항입니다. 당사자의 동의가 있거나 우월한 공익적 요청이 없으면 공개될 수 없죠. 이것을 어기고 공개하면 초상권 및 성명권 침해가 됩니다. 이러한 인격적 사항의 무단공개를 막는 방법이 익명 처리랍니다.
이미지 출처_ 위키백과
두 번째, 기자 입장에서 익명 보도는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사건 당사자가 아닌 사건의 내용만을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장치이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아래에서 제시한 기사가 하나의 예인데요. 이 기사에서 기자는 어린 아들을 떠나보낸 한 부모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아이를 치료한 병원과 의사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사고를 낸 게 누구인지보다 사고의 진실이 어둠에 파묻히는 구조에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유가족의 바람’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이처럼 익명 보도는 독자나 시청자들로 하여금 사건 당사자가 아닌 사건의 내용에 관심을 집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죠.
이러한 두 가지 필요성을 살펴보면, ‘사건의 내용만 전하고 누구인지 알리지 않는다.’라는 익명 보도의 원칙이 세워집니다. 이 원칙이 존중되기 위해서 기자는 먼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해야 하죠. 사건의 내용만을 전할 것인지, 아니면 누가 한 것인지도 알릴 것인지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죠. 그러면 익명 처리라는 문제가 단지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법적 요구가 아닌, 관점이 명확한 기사 쓰기의 방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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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보도의 원칙은 말 그대로 ‘원칙’일 뿐이며 항상 익명으로 보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익명 보도가 실명 보도보다 바람직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죠. 오히려, 익명으로 보도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실명으로 보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익명 보도해야 할 때와 실명 보도해야 할 때를 구분하는 기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우선, 사건 당사자가 공인인지 여부가 익명 처리에 관한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공인에 관한 보도라면 실명 보도가 대체로 가능하죠. 심지어, 이 경우 당사자가 공인이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기사화할 가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취객이 난동을 피운 사건을 예로 들어볼까요? 지하철 1호선에서 이런 일은 그저 일상의 풍경입니다. 기삿거리가 못 되죠. 그런데 그 취객이 국회의원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검사 혹은 성직자였다면 또 어땠을까요?
두 번째로 우리 사회 구성원 일반의 건강이나 안전, 행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서 그 사건의 당사자나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정보를 줄 필요성이 있는 경우라면, 반드시 실명 보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날짜를 바꿔 팔았다고 한다면 마땅히 해당 마트의 이름을 공개해야 하죠. 모 분유 회사의 제품에서 인체에 해로운 성분이 검출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익명 처리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는 경우라면 반드시 실명으로 보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요. 기자가 당장의 명예훼손 논란이라든가 이의제기를 피하기 위해서 익명처리를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부적절한 익명 처리가 오히려 피해를 확대시키고, 엉뚱한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으니 신경써야하죠.
또한, 대상 집단의 크기가 작아 다른 집단과 구분이 명확해서 익명 처리할 경우 그 집단에 속하는 구성원 전체가 의심받게 되는 경우에도 익명 처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난 1999년, 기무사 장성 중 일부가 병역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한 방송사에 의해 보도되었는데요. 해당 방송사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기무사 장성 중 A, B, C 3명이 연루되었다는 식으로 익명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기무사 장성에 해당되는 사람은 불과 7명이었죠. 이 7명 중에는 의혹을 받고 있는 당사자도 있지만, 의혹과 무관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익명 보도는 의혹과 무관한 나머지 사람들까지 기무사 장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리에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하죠. 결국 소송으로 이어져 언론사의 명예훼손책임이 인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99가합95970).
이미지 출처_ pixabay by OpenClips
마지막으로, 공무 관련 보도 시 하위직 공무원이라도 가급적 실명으로 보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공인의 범위가 매우 불명확하기는 하지만 5급 이하 공무원은 대체로 공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5급 이하 공무원이 공인은 아닐지라도 행정업무의 실무적인 진행과 관련해서 하위직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공적인 감시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직까지 실명 보도가 허용된다고 공식적인 판단이 내려진 경우는 보이지 않지만 실명 보도를 적극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죠.
이와 관련하여 ‘제한적 공인’ 개념을 적극 도입하는 것도 검토해볼 만합니다. 관련 공무원의 직급이나 직위의 높고 낮음과는 별개로 사건의 성격에 따라, 담당하고 있는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보도에서는 실명 보도를 허용하는 쪽으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죠.
익명 처리의 방법이라고 하면, 두문자나 이니셜에 의한 성명 표기가 대표적입니다. 그 외에 방송에서 주로 사용되는 모자이크, 음성 변조 역시 초상권•음성권 침해를 피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당사자의 신원을 숨기기 위한 조치죠. 이와 같은 익명 처리 외에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 방송에서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기승을 부리고 있는 펜션이나 렌트카 업체의 불공정행위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펜션의 전경이 배경화면으로 나갔고, 해당 업체에서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와 손해배상을 구하는 조정을 신청했죠. 언론사는 해당 업체의 이름을 적시한 바 없다고 주장했지만 펜션의 전경이 나감으로써 어느 펜션인지 알 수 있다는 신청인 측 주장이 인정되고 말았답니다.
또한, 사례에서 제시한 것처럼 대학생 인턴제도의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보도가 당사자 특정 문제로 곤란을 겪은 경우도 있습니다. 인턴제도 자체의 문제점을 고발하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해당 보도에서 관련 기관이나 단체의 이름은 표시하지 않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원이었던 대학생의 발언 중 해당 단체의 대표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인용됨으로써 결국 그 주변에서는 어떤 단체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죠.
이처럼 요즘 익명 처리가 문제되는 사건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인적 사항과는 무관한 내용에서 발생합니다. 인적사항은 아니지만 당사자 특정의 요소로 문제되곤 하는 몇 가지를 열거해보면, 간판•차량번호•홈페이지 디자인•제품 사진•업체 전경•특이한 어법이나 말투 등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방송에서 모자이크 처리나 음성변조가 불완전하여 문제되는 경우도 의외로 많죠. 이런 문제들은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당사자 특정과 관련해 법원이 제시하는 기준은 ‘피해자 주변 사람들이 알 수 있었느냐?’죠.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보면, 현재의 익명 처리는 좀 어중간합니다. 인적 사항인지, 아닌지를 불문하고 익명 처리에 관해 좀 더 화끈할 필요가 있죠. 보여줄 것이면 확실히 다 보여주고, 가리려 면 확실하게 가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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