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20. 10:59ㆍ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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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내 개봉하는 영화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죠. 따라서 제목 자체가 이전에 비해 길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본제와 ‘나쁜놈들 전성시대’라는 부제로 이루어진 제목인데, 글자 수를 세어보니 총 열네 자입니다. <역린>, <표적>, <도가니>, <아저씨>, <우는 남자> 같은 두서너 자 제목에 비하면 퍽 긴 셈이죠. 외화 제목들 가운데 부제를 붙인 사례로는 <셜록홈즈: 그림자 게임>, <폼페이: 최후의 날>, <헤라클레스: 레전드 비긴즈>,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엑스맨: 데이즈 오브 더 퓨처패스트> 등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_네이버 영화 (이하 출처 동일)
이 같은 네다섯 자 이상의 긴 제목은 최근 10년간 일반적인 양식은 아니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네다섯 자를 넘지 않는 짧은 제목들이 주를 이루었죠. <접속>, <쉬리>, <황해>, <마더>, <화차>, <추적자>, <신세계>, <텔미썸딩>, <올드보이>, <오아시스> 등등. 외화의 경우에도 웬만하면 긴 원제를 짧게 줄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일례로 1991년 국내 개봉한 <터미네이터 2>의 원제는 <Terminator 2: Judgment Day>였습니다. 우리나라 극장에선 부제가 생략된 것이죠. 하지만 부제 붙이기가 하나의 제목 짓기 트렌드처럼 자리 잡으면서, 지난해 11월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할 때에는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요즘 국내 개봉 영화들은 왜 글자 수 증가를 감수하면서까지(제목이 길어지면 관객들이 쉽게 기억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으니까요) 부제를 붙이는 것일까요. 실제 사례들을 통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제 경우를 생각해보면 1990년대까지 속편을 인식하는 방식은 대부분 숫자에 의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속편 하나가 극장에서 개봉하면, 으레 “그 영화 ‘투’ 나왔더라?” “이번에 ‘쓰리’ 나온 거 봤어?” 하는 식으로 지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7년 작 <쥬라기 공원 2 - 잃어버린 세계>는 ‘잃어버린 세계’라는 흥미진진한 부제가 달렸음에도 그냥 <쥬라기 공원 2>로 통칭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의 원제는 <The Lost World: Jurassic Park>입니다. ‘쥬라기 공원’보다 ‘잃어버린 세계’가 먼저죠. 포스터에서도 ‘잃어버린 세계’라는 타이틀이 ‘쥬라기 공원’보다 서너 배는 큰 글씨체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세계’가 제목이고, ‘쥬라기 공원’이 부제인 듯한 효과를 내죠.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배치입니다. 전작과의 연결 고리와 전작의 브랜드 파워는 유지하되, 영속성보다는 ‘오리지널리티’를 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죠.
1995년 개봉한 <다이 하드> 세 번째 시리즈도 부제를 활용했습니다. <Die Hard with a Vengeance>라는 문장형 제목을 사용했는데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다이 하드 3>라는 다소 밋밋한 제목으로 개봉했습니다. ‘with a vengeance’는 ‘맹렬하게’를 뜻하는 숙어인데, 주인공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의 ‘die hard’(여간해서 죽지 않는) 속성을 더욱 억세게 강조해주죠. 관객들은 이 제목을 통해 주인공이 세 번째로 겪게 될 고난의 강도를 짐작하게 됩니다. 또한 ‘복수’를 뜻하는 단어 ‘vengeance’만 따로 떼어 해석할 경우, ‘복수해도 여간해서 죽지 않는’이라는 의미로도 읽히죠.
이 영화의 악당인 사이먼(제레미 아이언스)은 <다이 하드> 1편의 악당이었던 한스 그루버의 동생인데요. 형의 복수를 위해 존 맥클레인을 매우 악랄하게 괴롭힙니다. 그러나 역시 주인공은 ‘다이 하드’죠. ‘복수해도 여간해서 죽지 않는’이라는 제목은, 영화 속에서 펼쳐질 존 맥클레인과 사이먼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쥬라기 공원 2 - 잃어버린 세계>와 <Die Hard with a Vengeance>(국내 개봉명 <다이 하드 3>)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부제를 활용한 속편 제목은 ‘투’나 ‘쓰리’처럼 단순한 숫자 붙이기에 비해 더욱 오리지널의 속성을 강화해줍니다.
부제 활용이 유행이다 보니, 원래 부제가 없었던 외화들마저 국내 개봉 시 부제가 ‘창작’되어 달리기도 합니다. <Fast and Furious 6>는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 <Green Lantern>은 <그린랜턴: 반지의 선택>, <Pompeii>는 <폼페이: 최후의 날>, <The Legend of Hercules>는 <헤라클레스: 레전드 비긴즈>(원제인 ‘레전드 오브 헤라클레스’를 굳이 본제와 부제로 구분한 셈) 등등. 앞서 설명했다시피, 속편 제목에서의 부제 활용은, 속편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부각하는 효과를 냅니다. ‘투’나 ‘쓰리’ 같은 일련번호 따위에 귀속되지 않겠다는 자존심이 느껴지기도 하죠. 그런데 속편이 아님에도, 원제에 없는 부제를 굳이 따로 만들어서까지 붙여넣는 국내 개봉 절차의 사정은 무엇일까요.
현재 국내 영화들의 제목 짓기 ‘트렌드’는 두세 자 혹은 네 자짜리에서 <OOOO OOOO> 류의 두 음절로 서서히 옮겨 가는 듯합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7번방의 선물>, <은밀하게 위대하게>, <전설의 주먹>, <더 테러 라이브> 등등 최근의 흥행작들을 살펴보면 두 음절로 된 제목들이 눈에 띄죠.
특히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잘 지은 제목이라 할 수 있는데, 우선 ‘범죄와의 전쟁’과 ‘나쁜놈들 전성시대’라는 두 음절짜리 본제와 부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제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부제는 비리 공무원과 건달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제목 한 줄에 이 영화의 배경과 전반적인 내용 흐름을 퍽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셈이죠. 특히 총 열네 자로 이루어진 긴 제목임에도 잘 읽히는데, 이는 본제와 부제를 나누고, 또 그 각각을 두 음절로 구분하여 리듬감을 더한 덕분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의 제목 짓기 관습처럼 보였던 ‘두서너 자’ 프레임으로부터 탈피했다는 데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죠.
현재 한국영화를 비롯하여 외화의 국내 개봉 제목에 부제를 덧붙이는 트렌드는 어쩌면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의 성공을 기점으로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그러나 <Legend of Hercules>를 <헤라클레스: 레전드 비긴즈>라는 황당한 제목으로 바꾼 것이나, <Fast and Furious 6>에 ‘더 맥시멈’이라는 단순 자극형 부제를 삽입한 것은, 안타깝게도 ‘부제의 오남용’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례는 두 음절 제목 트렌드에 멀쩡한 원제를 억지로 줄이거나 늘여 맞춘듯하여 안타깝기도 합니다.
한 영화의 제목은 그 영화의 첫인상입니다.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풍부한 표정을 가질 수도, 매력이라고는 전혀 찾기 힘들 수도 있죠. 영화 내용이나 기획 의도에 대한 이해 없이, 단지 트렌드라는 이유만으로 부제 달기를 오용한다면, 해당 영화의 첫인상은 괴상해지고 말 것입니다. 너도나도 부제를 활용하는 요즘의 영화 제목들을 보면서, 그리고 좋은 예와 나쁜 예를 동시에 보면서, ‘트렌드’를 그저 쫓아가는 수동적인 사람과 ‘트렌드’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주체적인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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