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_뉴스 리터러시가 필요한 이유

2015.07.01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미디어 리터러시



글을 잘 읽으면 뉴스도 잘 이해할 수 있나?


<다독다독> 독자 여러분들 중에 이 블로그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KBS 1TV <뉴스사용설명서>(5월 17일)라는 프로그램을 보신 분들이 있으신가요? 많지 않은 기사 조회 수나 방송 시간대(일요일 오후 5시 10분)로 봐선 아마 그 프로그램을 본 분들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뉴스사용법’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겁니다. 글을 읽고 이해할 줄 아는 문해력(literacy)이 있고 정규 교육을 조금이라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뉴스를 사용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엔 뉴스를 시시한 것,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한 가벼운 오락거리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줄 겁니다.


뉴스 리터러시: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뉴스의 내용(텍스트)은 문자나 음성, 이미지, 영상 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글자를 알고 있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겐 텍스트 소비가 전혀 문제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뉴스를 읽고 그 의미를 해독할 줄 아는 능력, 즉 ‘뉴스 리터러시’(news literacy)는 오로지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해력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뉴스라는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맥락)도 알아야 ‘뉴스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뉴스라는 상품은 마트에서 구매하는 생활용품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라면(텍스트)을 소비할 때 우리는 라면이 만들어지는 과정(콘텍스트)을 굳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라면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을 안다고 해서 라면의 맛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보수적인 라면 회사냐 아니냐에 따라 라면의 품질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뉴스라는 상품의 생산과정에 대한 이해는 ‘뉴스의 맛’을 변화시킵니다. 



뉴스가 현실의 ‘투명한 재현’이 될 수 없는 이유


‘뉴스(텍스트)는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창이다’, ‘뉴스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뉴스를 통해 사회의 현실 전체는 아니더라도 그 일면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뉴스는 어떤 외부 대상을 아무런 왜곡 없이 ‘재현’(representation)하는 투명한 매개물이 아닙니다. 뉴스가 사회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수단이 되려면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사가 여러 가지 사회적 힘(정치, 경제, 문화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진공 상태’에 존재해야 합니다. 또한 뉴스의 객관성이나 공정성에 해를 끼칠 수 있는 ‘편향된 가치의 오염원들’이 차단된 ‘멸균실’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언론사는 사회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섬’이 아니니까요. 언론사야말로 그 어떤 기관보다도 정치와 경제 등이 복잡하게 얽힌 사회라는 커다란 지형도 속에서 특정한 ‘좌표 값’을 가진 제도입니다. 이 좌표 값(위치)은 당연히 그 언론사의 정치적 이념, 경제적 태도, 문화적 지향성(콘텍스트)에 따라 상대적이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을 구성하는 뉴스…뉴스 콘텍스트 읽기가 중요


그래서 뉴스가 사회 현실의 ‘반영물’(the reflected)이라는 말보다 ‘구성물’(the constructed)이라는 표현이 뉴스 리터러시(뉴스사용법)에 더 어울립니다. 투명한 재현, 혹은 반영이란 말 속에는 언론사가 지닐 수밖에 없는—그것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사회적 위치’가 생략돼 있습니다. 이는 언론사가 중립적이라는 기대와, 뉴스가 객관적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상황에서 뉴스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현실로부터 주어지는 것(the given)입니다. 이와 달리 구성된 뉴스라는 말은 뉴스 생산에 개입되는 어떤 내적·외적 요소들(맥락)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과 자본과의 관계, 지배적인 문화적 가치에 대한 선호 등이 뉴스와 언론사를 둘러싼 외적 요소를 가리킨다면, 언론사 내부의 뉴스 생산관행은 내적 요소에 해당됩니다. 어떤 출입처에 가고, 무엇을 뉴스거리로 채택하며, 어떤 성향의 데스크(부장)나 편집국장이 뉴스를 편집하느냐, 조직의 인사·경영을 책임진 사주의 정치적 성향과 인맥은 어떤지 등이 뉴스의 내부 생산과정을 결정하는 변수가 될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뉴스 텍스트의 의미에 국한된 ‘뉴스 읽기’(news-text reading)는 뉴스생산의 맥락을 아우르는 ‘뉴스 리터러시’와 같을 수 없습니다. 뉴스 리터러시에는 ‘뉴스 콘텍스트 읽기’(news-context reading)가 배제되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프리즘으로서의 뉴스…달라지는 현실의 색깔


뉴스의 콘텍스트를 읽어야 뉴스를 잘 읽을 수 있다는 말씀을 언론사가 자신의 입장에 따라 거짓말을 한다거나 뉴스가 가짜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무턱대고 사실이 아닌 정보를 유포하는 언론사는 없으니까요(아마 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사실을 전달합니다(아마 그럴 겁니다). 그러나 똑같은 정보와 사실이라도 뉴스 안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뉴스의 방향은 달라집니다. 동일한 뉴스라도 그 뉴스의 보도 순서에 따라, 그 뉴스가 놓인 지면의 위치에 따라 그 뉴스의 가치는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사실의 조합, 뉴스의 배치 등은 뉴스 그 자체에 필연적으로 내재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조직이 결정하고 만듭니다. 사람과 조직의 판단은 그것이 놓인 사회적 좌표와 조직 내부의 관행이 구성해냅니다. 그래서 같은 사실이라도 누가, 어떤 언론사가 보도하느냐에 따라 ‘현실의 색깔’은 달라집니다. ‘뉴스의 색깔’도 마찬가지고요.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몇 가지 색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뉴스 리터러시를 배양하는 일은 뉴스가 원래부터 투명한 창(window)도, 완벽한 거울(mirror)도 아니라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걸러내는 ‘프리즘’(prism)이란 사실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비판적 사회 읽기로 나아가는 뉴스 리터러시


사설이나 칼럼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뉴스의 정치적 편향성(정파성)이 문제가 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뉴스 텍스트 자체의 편향성이 좋든 싫든 불가피한 경우라면 그러한 편향성을 야기하는 요인들(콘텍스트)로 관심을 전환해보는 건 어떨까요. 뉴스와 언론을 구성하는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뉴스 리터리시는 ‘비판적 사회 읽기’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 추신: (괄호 안에) 영어 표현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핵심적인 단어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쓴 것이니 불편한 분들이 계셨다면 양해 바랍니다.


<참고자료>

금준경(2015.5.7.) “조선일보도 한겨레도 아이들에게 추천할 수 없다” [미디어오늘 창간 20주년 기획] (16) 강한 정파성, NIE 교재로서 한계… 비판적 읽기 교육 방법론도 부재. http://special.mediatoday.co.kr/journalism/?p=403

김재영(2011). 미디어 조직과 메시지 생산과정. 한국언론정보학회 편. <현대사회와 매스커뮤니케이션>(개정 2판). 파주: 한울.

임영호(2005). <신문원론>(개정 2판). 서울: 한나래.

게이 터크만 지음/ 박흥수 옮김(1995). <메이킹 뉴스: 현대사회와 현실의 재구성 연구>. 서울: 나남.

Razvan Sibii(2009). Media literacy. In Christopher Sterling(Ed.). <Encyclopedia of journalism>. Thousands Oaks, CA: S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