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7. 14: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5년 7월호>에 실린 연합뉴스 사회부기자 / 권영전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지금 김 양이 얘기하는 것도 어린 학생이 거짓말을 얘기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고 아버지도 거짓말을 할 거란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김 양은 자신의 상상을 진실로 믿는 ‘리플리 증후군’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아버지 김 씨의 말대로 치료를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명문고에 다닌 한국인 여성이 하버드와 스탠퍼드에 동시 입학했다고 주장하자 한국 언론들은 일제히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이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자 다시 이번에는 반대의 내용이 담긴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 때문에 언론이 검증도 없이 오보를 내느냐는 비판도 여기저기서 많이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속보와 선정성으로 시청자와 독자의 눈길을 끌어야 하는 지금의 언론 환경에서 오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오보인지 아닌지 애매한 발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 양이 거짓말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든다’는 말이나 ‘김 양은 리플리 증후군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치료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는 말 속에는 아무런 ‘사실’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보도도 아니고 오보도 아닌 이상한 ‘생각’보도입니다.
‘나는 생각한다’와 ‘사실은 이렇다’
기자들이 모두 취재를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속보가 중요한 시대에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앞서 김양의 사례만 봐도 그렇습니다. 기자와 앵커는 스튜디오에서 “아직 취재가 충분히 되지 않았지만” “이 부분은 추측입니다만” “이런 추정이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만”이라고 시청자들에게 변명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럼 충분히 취재하고 보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뉴스 방송 시간은, 조·석간 마감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24시간 뉴스 사이클에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를 무작정 문제 삼기도 어렵습니다.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만약 기삿거리를 일주일씩 취재하고 나서 보도한다면 아무도 그 기사를 보거나 읽지 않을 것입니다.
언론진흥재단 탐사보도팀이 IRE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전 방문한 CNN,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는 분명히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월스트리트저널은 메디케어 프로그램에 대한 자료를 달라는 요청을 정부가 거절하자 회사가 직접 소송을 내 3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결국 정부가 자료를 공개하도록 만들 정도로 회사의 탐사보도 의지가 강했습니다. 개인의 열정과 능력이 탐사보도를 좌우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한국과는 사뭇 다릅니다. 워싱턴포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탐사보도의 특징을 알고 회사가 이를 지원하고 기다려준다는 게 워싱턴포스트 탐사보도팀의 설명이었습니다. 어떤 보도는 4년간 취재해야 하는 것도있고, 어떤 보도는 6개월만 하면 되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 성격에 따라 회사가 기다려준다는 것입니다.
취재원 관리? 역시 술이 최고
CNN에서는 탐사보도팀이 아니라 디지털 프로듀서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관련 업무를 했습니다. 한국의 뉴스 매체가 SNS를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이를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달리 이들은 새로운 SNS를 이용해 뉴스를 만드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트위터의 페리스코프로 뉴스를 만드는 모습이나 주로 10대들이 많이 쓰는 스냅챗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모습이 그랬습니다.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질문을 거듭하다보니 사실 이들도 결국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들은 워낙 긴 취재 과정을 거쳐 나오는 탐사보도가 너무 길어 독자들에게 읽히지 않을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린아이가 보면 어떨까”하는 심정으로 글을 다듬고, 휴대전화로 기사를 읽을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기사를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모바일이 화두인 한국의 모습과 닮은꼴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워싱턴포스트에서는 그들과 우리의 취재 방식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취재원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술을 마신다고 답해 공감을 자아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 어디서나 기자들이 취재원과 술을 마시는 것은 똑같은 것 같다며 웃었습니다. 심지어 소방당국을 담당하고 있다는 한 기자는 소방관들의 근무 교대가 오전이라, 그들과 친해지려고 아침부터 술을 마신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CNN에서는 그들 역시도 뉴스의 중심이 언론사에서 인터넷 업체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를 우리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페이스북이 뉴스에 대한 제어를 이미 시작했으며 규정과 알고리즘이 바뀔 때마다 노출도가 변하는 것을 관찰하고 있으나 사실상 이에 대해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우리와 같았습니다. 결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IRE 콘퍼런스에서도 우리와 같은 고민이 묻어나는 순서가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탐사보도의 자세를 배우다
NBC뉴스의 스콧 맥팔렌은 정부의 보고서들을 읽는 것으로 탐사보도를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부 보고서에서 알 수 없는 것은 정보공개청구를 활용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한국의 취재 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 ABC뉴스의 매건 처치매치는 우리와 같은 듯 다소 다른 취재 문화를 소개했습니다. 무언가 ‘속보’가 등장해 모두가 현장으로 달려갈 때 ABC의 탐사보도팀은 우선 회의를 했습니다.
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탐사보도를 위해 인터넷과 모바일을 널리 활용하는 이들의 자세였습니다. 어느 언론인은 ‘30분 안에 50개 앱’이라는, 리스티클 기사(‘~하면 안 되는 12가지 이야기’류의 글) 같은 제목으로 세션장에 탐사보도 기자들을 가득 모으기도 했습니다. SNS 흐름을 지켜볼 수 있도록 고안된 ‘밴조’ 앱은 개발사가 직접 나서서 언론인들에게 사용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언뜻 보기에는 탐사보도와 직접관련은 없어 보이는, 어떻게 하면 웹 사이트 트래픽을 늘릴 수 있을지에 대한 강연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들이 가진 탐사보도에 대한 열정과 독자를 얻고자 하는 열망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미국에서도 탐사보도가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미국 언론이 탐사보도를 시작한 것은 애초에 상업적인 목적에서였습니다. 컬럼비아대 탐사보도센터장인 실라 코로넬 교수는 1900년대 미국에서 탐사보도가 시작된 것은 독자를 끌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탐사보도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가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이를 위한 토양도 잘마련돼 있어서,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가 언론사를 명예훼손 피소 위험에서 어느 정도 보호해줄 수 있었습니다.
쿼바디스 탐사보도
문제는 인터넷 이후입니다. 인터넷 이후 신문들은 수익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고 신문사의 사업 모델이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습니다. 고급 인력을 오래 투입해야 하는 등 예산이 많이 필요한 탐사보도도 어쩔 수 없이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코로넬 교수는 “뉴스가 많은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탐사보도와 같은 집중적인 보도가 오히려 독자들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다”고 강조하긴 했지만, 이는 미국에서도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고 한국에서는 포털과 ‘베끼기 언론’ 때문에 더더욱 현실과 괴리된 인식입니다. 어쩌면 탐사보도의 주도권이 점차 프로퍼블리카나 뉴스타파처럼 비영리를 내세운 단체에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버즈피드나 허핑턴포스트처럼 홈페이지 트래픽을 늘리는 걸 지상 과제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매체들이 속속 탐사보도에 나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반갑기도 합니다. 실제로 시모어 허시도 버즈피드를 언급했습니다. 그는 “좋은 보도를 하는 데는 돈이 들고 신문은 이제 그럴 돈이 없다”면서 “(탐사보도의) 미래는 버즈피드나 그 유사 매체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갓 걸음마를 뗐다고 평가받는 한국의 탐사보도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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