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속에 사라져가는 나를 찾아서

2015. 10. 26.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5년 10월호>에 실린 EBS 교육다큐부 PD 남내원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 '팔짱 낀 사나이', 아우구스트란트메서)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그 속에 드리워진 삶의 고단함과 광기의 그림자. 히틀러에 열광했던 군중속에서 얼굴을 찌푸린 채 팔짱을 낀 단 한 사람. 이 사람 앞에 펼쳐졌을 비극적 운명을 예감함과 동시에 “이 사람은 왜 손을 들지 않았을까?”라는 강한 호기심이 생겨났습니다. 어쩌면 팔짱을 끼고 있는 이 단 한 사람의 이야기야말로 ‘우리 We’의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의 나에 관한 이야기였고, 나일 수도 있었던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우리’ 이야기 ‘나’의 이야기


추상적이고 이중적인 ‘우리’의 실체가 문제였습니다.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주제지만, 여러 해석이 가능한 논쟁적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주제의식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을 확장해 나가기로 하고 전체 이야기에 녹아들기 힘든 단편적이고 분절적인 아이디어는 과감하게 배제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 관한 몇 가지 암묵적 동의에 이르렀습니다.


첫째,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라는 집단에 매몰되거나 ‘나’라는 개인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속에서 사라져가는 ‘나의 부재’를 성찰해보는 것이 프로그램의 핵심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둘째,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권위적 조직 문화 속에서 침묵 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과 그들이 겪는 모멸감, 이로 인한 부정적 감정의 전염과 확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했습니다. 셋째,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더 나은 우리’의 조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강력한 집단주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가 어떻게 세계 최하위의 공동체지수를 가지게 됐는지, 2015년 대한민국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멀리서, 때론 가까이에서’라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집단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멀리 떨어져 ‘우리’를 규정하는 사회구조적 문제와 심리를 분석하기로 했습니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잘못된 팩트를 재해석하고 현상과 현상을 하나의 관점 하에 연결해보기로 했습니다.




회사 섭외 잔혹기


본격적인 촬영과 함께 섭외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중에서도 ‘조직 문화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할 회사 섭외는 가히 ‘회사 섭외 잔혹기’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습니다.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조직 문화 개선에 관심이 많고 CEO의 의지가 확실한 기업을 대상으로 섭외를 진행했습니다. 실무진과의 미팅이 잡히기 전 회사별로 특화된 별도의 기획안을 준비했고, 그 회사 가 처한 현상황에 대한 충분한 자료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모두가 조직 문화로 인해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프로그램이 조직 문화 개선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회사 윗선에서 난색을 표해서….” 항상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언론에 비친 회사의 이미지와 실제 구성원들이 느끼는 조직 문화의 체감도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습니다. CEO의 의지는 개인적인 관심사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화’나 ‘시스템’으로 정착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말 많은 기업을 접촉했던 4개월의 회사 섭외는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아닌 병원의 의사소통 방식을 통해 공공 영역의 조직 문화를 보고자 했던 ‘플랜B’의 섭외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공동체지수 0점’의 충격


'우리'속으로 들어가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터뷰가 중요했다. 직장인들은 그들의 신분을 철저히 보호하는 동시에 의자 자체가 침묵과 모멸감을 느끼는 직장인들을 상징할 수 있는 장치가 되도록 설정된 세트 위에서 진행됐다.


모두가 정말 힘들게 조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정확하게 알고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나섰다가…” “예전에 해봤는데…”. 찍힐까봐 두려워했고 쫓겨날까봐 몸을 사렸습니다.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무기력을 호소했습니다.


바나나를 따먹으려 시도하는 원숭이들이 물세례를 받도록 설꼐한 실험을 통해 부정적경험과 감정이 공동체 속에 확산되면서 무기력해지는 개인을 확인할 수 있다.


원숭이 우리에 바나나를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나를 당기면 물이 쏟아지는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오는 원숭이. 점프를 해서 바나나를 따먹으려는 순간 물 이 쏟아집니다. 황급히 달아나는 원숭이.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는 동료 원숭이들. 바나나에 호기심을 보인 다른 원숭이들도 물벼락을 맞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 속 원숭이들을 한 마리씩 교체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떤 원숭이도 바나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숭이들은 왜 더 이상 바나나를 따지 않았을까요? 바나나를 따면 물벼락을 맞는다는 사실을 직접 겪었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벼락을 맞는 동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나나에 대한 유혹이 사라질 만큼 부정적 감정의 힘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직접 물벼락을 맞는 모습을 보지 못한 원숭이들에게도 전염될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정적 감정이 확산되면 원숭이 들은 점차 무기력해지고, 이 무기력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다면 우리 속 원숭이들은 더 이상 바나나를 쳐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실험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집단 속에서 ‘나’를 드러내는 순간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본능적으로,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물벼락을 맞거나 동료가 물벼락을 맞는 부정적 경험을 수없이 보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물벼락을 맞지 않으려고 모멸감을 견디고 침묵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 곳곳에 하나 의 ‘조직 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 풍토에서 행복해지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철저하게 ‘나’와 ‘우리’를 분리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한국사회의 공동체지수가 0점이라는 충격적 결과는 내가 겪은 개별적 경험들이 누적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중하지 않으면 괴물로 남을 것


먹고살기가 화두인 각자도생의 시대에 ‘우리’라는 공동체는 어떤 의미일까요?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도 누군가에게는 회사다”라는 모토 하에 새로운 조직 문화를 만들 어가는 CEO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회사이고, 당신 또한 나에게 회사라 면 그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핵심은 서로에 대한 존중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나입니다.” 관점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추악한 괴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고,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우리’ 안에서 존중받지 못한다면, 우리를 향한 연대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