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다락방에서 책 읽기

2015. 12. 31.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생활백과



다락방 비좁은 서가의 흡인력 


이사한 후, 천장 낮은 다락방에 책들을 들이자니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어요. 이사 전 이미 열두 박스가 넘는 책들을 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못 버린 책들이 여전히 많았고, 가져온 책장의 높이는 2미터에 가까운데 다락방의 높이는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책 박스를 못 푼 채 몇날 며칠 고심을 거듭하던 차, “유레카!” 단번에 고민을 날려버릴 가히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눕히면 돼!” 


책장을 세로로 세워야만 한다고 누가 그랬던가요? 고정관념이 고정관념인 걸 알아채는 때는, 바로 그걸 깬 다음이지요. 몇 개의 책장을 겹겹이 옆으로 눕히고 책을 꽂으니 작은 도서관 서가처럼 되었습니다. 책장 사이 통로로 기어들어가 책을 찾고, 맘 내키면 책장에 등을 기대거나 통로에 그대로 엎드려 책을 읽어요. 물론, 어두운 구석자리라 전등이 필요해요. 아이의 어린이책을 모아둔 왼쪽 서가엔 작은 독서등을 매달고, 나의 단행본들이 모여 있는 오른쪽 서가엔 앉은뱅이책상과 탁상용 전등을 놓았습니다.  


천장이 낮은 다락방의 박공지붕 양쪽으로 책장을 눕혀 도서관식 서가를 만들었어요. 왼쪽은 어린이책으로 꾸민 아이의 공간, 오른쪽은 나의 공간입니다.


추울 땐 따뜻한 공간으로 모여들기 마련이지요. 우리집에서 그런 공간은 바로 다락방이에요. 겨우내 우리집 다락방은 침실이자, 바느질방이자, 독서방이 됩니다. 다락방은 어른이나 애나 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 비좁은 공간은 흡인력이 강하지요. 엄마 자궁 속처럼 비좁고 어둑하고 따뜻한 공간이라 그럴까요. 아이들도 구석진 곳, 자기만의 비밀 공간을 좋아하잖아요. 모태 속의 안정감이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다락방의 비좁은 서가는, 밤늦어 모두 잠자리에 들었거나 새벽에 나 홀로 어쩌다 깨어났을 때 잠든 식구들에게 방해 안 되도록 조용히 이불을 빠져나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일단 저 안쪽으로 들어가면 쉽게 못 헤어나니 조심해야 해요. 양쪽 벽이 온통 책이니, 탐독의 욕망을 제어하기 어렵거든요. 하릴없는 시절이라면 그것도 괜찮겠지만, 내 손을 기다리는 온갖 일거리들이 줄을 서 있는 마당에는, 도리가 없죠. 


읽고, 표시하고, 기록하기


내겐 고질적인 독서 습관이 하나 있어요. 연필이나 포스트잇 없인 책을 못 읽는 거죠.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연필을 못 찾으면 책을 한 페이지도 못 넘길 정도였어요. 오른손에 연필을 쥐고 나서야 비로소 차분한 마음으로 책에 몰입할 수 있었지요. 


왜 연필이 필요하냐고요? 공감 가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낫표도 치고, 때론 오자도 바로잡고 메모도 끄적여야 하거든요. 책의 오자를 바로잡지 못하면 맘이 불편해요. 오자가 지나치게 많은 책, 번역문이 거칠고 불편한 책은, 책의 본질이라 할 내용의 핵심에 다가서기가 힘들어요. 불성실한 편집과 글맛을 잃은 번역은 원저자에게 재앙이지요. 하지만 대체로 잘 편집된 책에서 어쩌다 발견되는 한두 개의 미묘한 오자는, 책 만드는 사람의 인간적 숨결이 느껴져서 그리 밉지만은 않더군요. 


각별한 책을 만나면 “연애편지의 답장을 읽을 때처럼 읽는다”는 표현에 공감하여 밑줄을 그었군요. 연애편지의 답장이라면 한 문장, 한 단어, 행간의 숨은 뜻까지 집중해서 읽지 않을 수 없겠지요. <천천히 읽기를 권함>의 한 페이지.


나의 이런 독서 습관이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어요. 도서관이나 지인에게서 빌려온 책에는 밑줄을 맘대로 그을 수 없잖아요. 더구나 그런 책에서 심각한 오자라도 만나면? 대략난감이지요. 어쩔 수 없이 오자는 눈 질끈 감아 넘기고, 공감 가는 좋은 문장은 독서노트에 펜으로 옮겨 적어둡니다. 그러면 밑줄 못 긋는 한이 조금은 풀려요. 


요즘엔 연필보다 포스트잇을 자주 사용합니다. 책을 읽으며 인상적인 구절,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에 포스트잇을 붙여요. 책을 다 읽고 나면 포스트잇 붙인 자리만 다시 펼쳐서 읽죠.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다 싶으면 독서노트에 옮겨 적습니다. 내가 읽은 책의 가장 농밀한 에센스를 뽑아 기억 창고에 저장하는 마지막 절차죠. 처음에 한 번 읽고, 포스트잇을 따라서 두 번째 읽고, 독서노트에 적으면서 세 번째 읽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에 책을 새기지요. 


책을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이고, 독서노트에 옮겨 적으며 포스트잇을 뗍니다. 연필로 밑줄을 긋는 방식은 다른 식구들의 독서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요즘엔 좀 자제하는 편이에요.



책을 사용하는 네 가지 방법


아래의 내용은 어디서 보고 베껴둔 건데, 출처를 기억할 수 없군요.


<책을 사용하는 네 가지 방법>

1. 쌓거나 펼쳐 가구나 쟁반, 베개를 삼기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의 가난뱅이)

2. 우상 숭배. 희귀도서 수집가. 물신 숭배자 (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의 파르가스)

3. 안일하고 진부한 체계에 맞춘 독서. 판에 박힌 교과서적 분류법에 사고를 고정시키고 순서대로 읽기 (사르트르의 <구토>의 독학자)

4. '나의 성장'을 위해서만 존재 가치가 있는 책, 책을 우상 숭배하지도 않고 책의 가르침을 수동적으로 따라가지도 않으며, 고민을 함께 풀어갈 스승으로 봄. (카뮈의 <전락>에 나오는 클레망소)


1번 방식으로 책을 사용한 적은 없고, 2번 욕구 역시 없지는 않았지만 약했어요. 지적 욕망과 허영이 버무려져 3번처럼 도전하고 이내 좌절한 경험은 오래전에 여러 번 했네요. 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당연히 4번 방식으로 읽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읽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지요? 


나를 뒤흔드는 책, 내 굳어진 의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책, 내 안에 불명확하게 꿈틀거리던 생각을 번개 내리치듯 적확한 문장으로 묘파한 책, 읽는 도중 새로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마구 솟구치는 책, 읽다가 설렘으로 잠시 덮고 가슴을 진정시켜야 하는 책, 한 걸음 행위로 나아가게 하는 책, 그런 책들이 일으키는 동요와 흥분을 나는 사랑해요. 책으로 남겨진 ‘그이들’의 정신, 깨달음, 생명력을 전이 받고 나는 한 단계 성장합니다. 마음의 성장은 몸의 성장이 멈춘 후에도 계속되지요. 나는 늙어가지만 여전히 성장합니다. 고루한 나, 고집스런 나, 변하지 않으려는 나를 직시하고, 유연한 나, 받아들이는 나, 어린아이처럼 커가는 나를 느낍니다. 나이 먹을수록 오만하고 나만 옳다 고집하는 늙은이가 되지 않기 위해, 나를 균열시키는 외부, 타자를 만나는 일에 게으름부리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카프카, <변신> 저자의 말 중) 

- 박웅현, <책은 도끼다>(북하우스) 중에서


오래전 독서노트를 꺼냈습니다. 법정스님의 책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서 옮겨 적은 구절들이 보이는군요. 다시 읽어도 새롭네요.


학창 시절엔 문학 작품 읽기에 열렬히 빠졌었지요. 직장인이 된 후엔 내적 갈망보다는 외적 요구, 직업적 의무로 읽었던 책이 많았고요. 읽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분야까지 꾸역꾸역 읽곤 했으니, 그다지 행복한 독서는 아니었지요. <천천히 읽기를 권함>의 저자인 야마무라 오사무는 그런 방식의 책 읽기를 ‘독서’가 아닌 ‘살펴보기’ 혹은 ‘참조’라 일컫더군요. 


물론 어떤 책은 실용적 필요에 의해 읽습니다. ‘참조’ 방식으로 읽는 게 문제될 건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읽어서는 문장과 행간이 전하는 울림과 내밀한 본뜻을 놓치게 되는 책들도 많거든요. 책이라는 물성을 매개로 시공간을 초월해 글쓴이의 내면과 마주치는 짜릿한 공명의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천천히 읽기’의 묘미를 금세 이해할 겁니다. 허겁지겁 읽어치우면서 잠시 느끼는 정복감과 권수 축적의 욕망 말고, 내 안에 차오르는 환희와 설렘, 감각이 열리는 즐거움, 느긋한 평화의 순간, 그 참맛을요.


젊었을 적에는 독서를 하면서 그러한 감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 더 성급했었다.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어떤 책에 감동한 적은 있었어도 독서 자체에 감동하는 일은 없었다. 시간은 피어오르고 펼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지금은 확실히 독서의 감각이 달라졌다. 체감으로 알 수 있다. 언제쯤부터 알았을까, 그것도 알고 있다. 바로 천천히 읽게 되고 나서의 일이다.

- 야마무라 오사무, <천천히 읽기를 권함>(샨티) 중에서


지금은 아무 강박 없이 마음이 끌리는 쪽으로 읽습니다. 천천히 읽고, 손글씨로 눌러 적지요. 독서노트를 쓰는 습관을 들인 지도 십수 년 이상 되었네요. 내 마음이 공명했던 글, 곱씹을 문장들이 독서노트에 빼곡하게 담겨 있지요. 가끔 마음이 길을 잃을 때, 오래된 독서노트를 펼치곤 합니다. 내게 치유의 힘을 준 글들은 다시 읽어도 참 좋아요.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농부는 책 읽는 일에 긴 호흡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요. 늘 읽고 싶은 게 책이지만 시간도 체력도 빠듯합니다. 농부한텐 주말도 휴일도 따로 없거든요. 이제 바야흐로 농부의 휴가철, 책 읽기 좋은 계절 겨울이에요. 표지만 봐도 설레는 책들이 책장에서 나를 손짓하는군요. 천천히 음미하듯 읽으며, 마음속에 번지는 균열을 기꺼이 반기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