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에 늦는다는 친구 연락이 반가운 이유

2011. 11. 8. 09:28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반쯤 몸을 빼 문에 걸린 신문을 손에 듭니다.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건 후 손에 신문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저의 일상이죠. 

손으로 신문을 들고 연신 눈으로 활자를 쫓아갑니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조그만 화면 속으로 텍스트와 조우하는 동안 저는 여전히 인쇄된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에 바쁩니다.

전자책이 나오고, 전자책을 잘 읽을 수 있는 단말기들이 등장하면서 종이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늘 책과 신문 그리고 잡지로 무거운 제 가방의 존재를 아는 지인들은 전자책의 존재를 반기며 “이제 너는 무거운 가방에서 해방이겠군!”이라 하셨어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제 가방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읽는다는 행위는 오감 충족의 행위입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 손으로 느끼는 촉감, 그리고 종이 넘기는 소리의 청각, 오래된 책에서 혹은 새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 등이 충족감을 주죠. 그러니 결코 전자책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의 제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퇴근시간, 밥이나 같이 먹자는 친구의 말에 근처 커피숍에서 친구를 기다립니다. ‘미안, 조금 늦을 것 같아.’라는 카톡 메시지. 익숙한 듯 초코케이크를 하나 시키고 다시 커피 한잔을 더 주문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강연회에서 저자 사인까지 받아 고이 가방에 넣어둔 책을 꺼냅니다. 주변에 이야기 소리, 음악소리, 커피 내리는 소리 등등 모든 소음들도 10여분이 지나면 고요해집니다. 온전히 책 넘기는 소리와 텍스트를 눈으로 쫓는 행위만 존재할 뿐입니다.


 


책이건 잡지건 혹은 신문이건 모든 읽기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저에게는 ‘찌찌인형’이기 때문입니다. ‘찌찌인형’이 뭐냐구요? 아주 오래 전 TV에서 방영한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만화가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 니나를 대마왕에게 빼앗긴 폴이 여자 친구를 찾기 위해 이상한 나라로 가서 겪는 일들이 주 내용이죠. 이 만화에서 폴이 이상한 나라에 가기까지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게 바로 ‘찌찌인형’입니다. 

요정이 깃든 인형은 시간을 멈추는 기능을 갖는데, 그 때문에 폴은 이상한 나라로 니나를 구하러 갈 수 있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상을 살 수 있습니다. 저에게 읽기는 사랑스런 ‘찌찌인형’입니다. 일찍이 다작가이자 대학자였던 ‘다산’은 서간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습니다.

"한가로운 여름날, 종제(從弟)인 공권이 시집 한권을 맡기면서 "이것은 강릉 사는 최군의 작품인데, 품평해주십시오." 한다. 내가 남의 시집을 열람한 것이 백여 권을 헤아린다. 헐뜯을 것인가?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다. 그러면 칭찬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싫다. 그러니 이놈의 물건을 만나면 벌써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며 눈썹이 곤두선다. 결국 미적거리며 책을 가져다 옆 눈으로 힐끗 보았다. 몇 편을 읽어나가자니 눈썹이 퍼지고 눈이 크게 떠지며 나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나고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능운부]를 읽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사람됨을 상상하는 것이 즐거워진다.“



종제로부터 책을 한 권 받은 다산은 책을 들고 고민합니다. ‘이 책을 읽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엇이라 말해야 하나? 그렇다고 칭찬만 하자니 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하지만 책 좋아하는 자의 본능으로 인해 눈이 자꾸 책으로 향합니다. 결국 다산은 책을 꺼내 읽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동공이 커지고 손가락이 꿈틀거립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글이 선물하는 비현실의 세계로 빠져 듭니다.

읽기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읽기는 현실에서 벗어나 무엇인가에 푹 빠져들어 다른 세상을 그릴 수 있게 해줍니다. 

눈으로 글을 쫓고 머리에서 글이 만드는 세계가 재현되는 동안 몸은 현실에 있지만 의식은 현실을 벗어나죠. 때로는 주인공을 따라 유럽 어느 이름 모를 도시에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외로움에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아프리카 어느 사막에서 길을 잃다 현자를 만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살인사건 현장에 있기도 합니다. 오싹하고, 때로는 슬프고, 그리고 즐거운 수많은 감정들이 비현실의 세계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거기에 푹 빠져 있다 보면 나는 이미 내가 아닌 것이 되죠. 아름다운 붉은 머리의 여인이기도 하고 방랑객이기도 하며 때로는 잔인한 살인자가 되기도 해요. 

현실도피. 누군가는 읽는다는 행위가 현실도피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잠시 책장이 다 넘어가는 동안만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행복해 할 뿐 아니냐구요. 

책장을 덮고 나면 끝날 아주 일시적인 행복이라고 말입니다. 현실의 불안과 삶의 불안은 도피를 꿈꾸게 합니다.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일상에서 몇 가지 쾌락 등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활자 역시 그런 쾌락의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쾌락은 꽤나 건전하지 않은가요? 

때때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알려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일시적 망각을 장기화시키기도 합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 혹은 지극히 밉상스러운 현실을 사랑하는 방법은 우리의 망각을 ‘장기화’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종교나 예술처럼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것을 장기화시키면 불안은 옅어진다는 거죠. 

읽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읽기라는 행위는 일시적이고, 200~300페이지의 책장을 넘기고 나면 끝날 일이지만, 여운은 오래가고 때때로 기나긴 여운은 행동하게 합니다. 

읽기의 유익함, 활자의 영향력 등등 사실 제가 말하는 것으로는 여러분들을 설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중독된 자에게 유익함이라거나 필요성을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제가 생각하는 '읽기'의 가치는 재미에 있습니다. 저는 활자를 봐야 살 것 같고 읽어야 숨을 쉴 것 같습니다. 

핸드폰은 없어도 가방에 읽을거리가 없는 건 참을 수 없죠. 식후의 커피는 참아도 취침 전 10페이지의 소설 책 읽기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활자가 주는 비현실은 달콤합니다. 그 안에서 맘껏 날아다니는 동안 진정으로 저는 자유를 느낍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번 이사 때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의 거친 눈총 속에서도 언젠간 집이 무너질 것이라는 엄마의 무시무시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무언가를 읽고, 읽을거리를 찾아 헤매는 것은 단지 재미 때문이죠. 

우리는 재미있는 것을 찾으면 주변에 권합니다. “야, 어제 너 그 드라마 봤어?”, “아니”, “그걸 왜 안 봐. 얼마나 재미있는데…….”, “그 영화는 봤어?”, “응”, “재미있지?”, “응” 

재미있는 것을 권하는 것은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합니다. 공원 벤치에 가끔 놓인 주간지나 잡지를 만나면 그걸 놓고 간 사람이 당신에게 읽기를 권함은 아닐까요? 읽기는 재미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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