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매일 '진짜 작가'를 꿈꾸는 이유

2012. 7. 6. 11:02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저는 꽤나 기특하게도 아주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즐겨했습니다. 나를 포함한 형제자매가 넷. 밥벌이에 쉼 없이 바쁜 부모님은 그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주기 위한 방편으로 무슨무슨 전집 같은 것들을 많이 사주셨는데 아마 그때부터 독서가 제 인생에 가장 큰 조각이 되었던 것 같네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난해한 동양문학전집이며 서양문학전집 따위를 의미도 모른 채 읽고 또 읽으며 시간을 때웠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단연 <돈키호테>. 그 안에서 자유와 일탈, 세상에 대한 풍자와 해학 등을 깨달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세상에 뭐 이렇게 해괴망측하고 재미없는 소설이 다 있나 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거든요. 물론 조금 철이 들고 난 후 만난 돈키호테는 닿을 수 없는 꿈에 손을 뻗는 자체로 이미 위대했지만요. 


독서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고 습관이 곧 삶을 이루어서였을까요? 이제는 책을 쓰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습니다.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소설가, 시인, 수필가 등의 경계도 없었고 막연히 내 이름 석 자를 딴 책을 쓰고 싶은 것, 늘 책을 만지고 냄새 맡고 품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유일무이한 꿈으로 다가왔지요.







작가 전경린은 그의 에세이에서 작가로 살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서른 세 살의 어느 봄날 세상이 내 눈앞에서 가만히 쓰러져 누웠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쓰러져 눕고 누런 풍진이 일어난 뒤에, 현실이 모두 지워져버린 광활하고 막막한 사막이 펼쳐졌다. 내 발밑 어디에도 당위의 길은 없었다. 허무 속에 떠 있는 한 점의 실존이라 할, 그 검은 자유의 자리가 내 글쓰기의 시원이었다.

작가 전경린처럼 내 실존과 자아를 찾아 헤맨 끝에 글쓰기를 선택한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저는 어려서부터 작가를 꿈꿔왔습니다. 해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되고 싶은 것은 언제나 늘 작가였지요.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열정과 꿈이 산처럼 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다만 분명한 것은 작가로 사는 일이 나를 가장 나답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자각이었어요.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찾아오지 않나요? 주어진 삶을 째깍째깍 살다가, 그러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가정을 이루고, 은퇴 준비나 노후 자금 따위를 염려하며 일상을 영위하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보다 더욱 지속성 있고 영원성에 가까운 것, 나를 더욱 나답게 가꿔주고 감춰졌던 욕망을 발현하게 해 줄 그 무언가를 갖고 싶다. 어쩌면 그 작은 깨달음이 꿈으로 걸어가는 첫 계단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강남의 33평 아파트나 해외 MBA 학위나 부장 명함 등등 사회가 내미는 욕망 말고 남들 눈에 먼지처럼 무의미해 보여도 오로지 내가 꿈꾸는 나만의 욕망을 원하는 순간 말이지요. 타인들에게 그것이 한낱 시간낭비에 불과한 헛짓거리일지라도, 혹 그것을 원하는 일이 내 이력이나 경력에 어떤 보탬도 되지 않을지라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그것에 발을 담그고 싶은 바람, 저는 그것이 꿈이라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작가가 되고 싶은 이유가 단순히 책이 좋아서였다면 스물을 훌쩍 넘긴 지금 ‘진짜 작가’를 꿈꾸는 이유는 좀 더 구체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하나, 저는 영원히 자유롭고 싶습니다.


물리적 자유보다는 정신적 자유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지향의 공간에 언제든 넘나들며 살기를 꿈꿉니다.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 아니라 타성이지요. 글을 쓴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타성에 찌든 삶에서 구원해 줄 동아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도 기꺼이 부여잡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소설에서 가능한 비현실들, 꿈, 갈망, 진실 따위를 매일 느끼며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고자 합니다. 


둘, 꿈을 창조하고 싶습니다.  


그 숱한 불면의 밤들, 내면의 고민이나 아픔 등을 문학에서 위로받고 치유했듯이 누군가에게 내가 쓴 글들이 위안이나 위로, 하다못해 쉼표라도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가 작가들의 삶이나 글을 보고 꿈을 가졌듯이 누군가 내 글들을 읽고 꿈을 갖게 된다면 인생을 몽땅 걸어도 충분하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셋, 책과 함께하는 그 긴 시간에 대해 변명이 가능한 충분한 명분을 갖고 싶습니다.


잠깐의 자유시간만 확보돼도 바로 책을 펼쳐드는 내 어쩔 수 없는 고질병에 대해 변명하고 다시 거기에만 사로잡힐 수 있는 확실한 명문이 필요합니다. 몇 날 며칠, 때론 몇 달이고 책을 읽고 쓰는 일에만 미쳐 지낼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운이 좋게도(모두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니까요) 서른이 되기도 훨씬 전에 제 이름 석 자를 건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어찌어찌하여 벌써 6번째 책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지요. 개인적인 생각과 독서이력을 단편적으로 묶은 졸작들에 불과하지만 저는 어쨌든 유치원 때부터 간직했던 꿈을 이룬 셈이 되네요. 책을 낸 사람이니 주변에서 작가라 불러주는 것이 마땅한데 아직도 저는 그 ‘작가’라는 호칭이 어색하고 간지럽기만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짜 작가의 모습과 조금도 근접하지 않아서일까요? 그래서 저는 요즘 회사마저 그만두고 나만의 성에 갇혀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생이라는 도구를 헐어야만이 비로소 짓기가 가능한’ 소설쓰기를 조금씩 현실세계에 끌어들이는 중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실패한 꿈’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릅니다. 혹시나 소설가가 되고 싶은 저의 꿈이 영원히 망상으로 끝나거나 세상의 외면만 받게 된다면, 그게 또 뭐 그리 대수일까요? 내 소설의 독자가 영원히 가족뿐이라 해도, 나를 최고로 지지할 가장 황홀한 독자를 둔 내게 어느 누가 실패를 운운하며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날마다 작가가 되기를 꿈꿉니다. 날마다 좋은 글을 쓸 순 없어도 날마다 좋은 작가가 되기를 이토록 간절히 꿈꾸니 다른 건 몰라도 저는 행복한 작가가 될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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