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독증에 가까운 여성이 힘겹게 신문 읽은 이유

2012. 8. 6.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달팽이의 한자말은 와우(蝸牛)다. 단어 속에는 소처럼 느린 달팽이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신문 앞에서 나는 달팽이가 된다. 어려서부터 활자를 받아들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난독증을 의심할 정도였으니, 신문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신문은 티브이 편성표를 확인하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시사와 교양은 짧고 강렬하게 알려 주는 티브이 속 르포 프로그램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시각적 자극이 익숙하고 편했기 때문이다.

 

선천적 결함이 있던 내가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정독하려면 네 시간이 걸렸다. 그런 탓에 신문은 달팽이가 짊어진 껍데기, 즉 패각(貝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신문을 펼쳐서 넘겨 나갔다. 줄을 긋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문구는 정성스럽게 오려 보관했다. 이렇게 시각보다는 촉각으로 신문을 접하며 즐거움을 찾았다. 달팽이처럼 더디지만 신문과 오롯이 소통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티브이와 인터넷은 빠르게 정보를 알려 준다. 게다가 현란하다. 현대인이 이들에 매료되는 이유이다. 그 옆에 놓인 신문은 수수하고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정보는 눈과 귀를 마비시킨다. 빠르고 화려한 정보에 익숙한 이들은 자아와 대면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티브이와 인터넷에 익숙한 사람들은 정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매체들이 쏟아내는 이야기가 내 의견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착각을 지적했다. 속도전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함정에 빠진다는 것이다.







눈과 귀로 빠르게 받아들인 정보는 오만하고 게으르다. ‘빠른 사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신문은 게으른 사고를 벗어날 유일한 통로이다. 달팽이는 ‘느림과 일정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신문은 달팽이처럼 ‘느린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느리다는 것은 지면 위의 정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의 다른 말이다. 나는 신문과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아와 만나게 되었다. 


신문에는 기자와 논설위원 등 많은 사람들의 시각이 담겨 있다. 신문은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알려 준다. 흔히 창의적인 생각은 디지털 사회의 유행에 민감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아날로그의 전형인 신문이 이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오해한다. 편하고 반복된 디지털 문화에 익숙해질 때 창의성은 개발되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신문을 읽는 독자는 소극적 지식에서 벗어나 해석하는 방법을 배운다. 한국 사회와 세계의 이슈를 통해 유행이 아닌 진실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정보를 기억하고 마음에 아로새기면 나만의 독특한 견해는 자연히 생겨난다.


신문에 도전하라. 그리고 신문 속 활자의 메시지에 응전(應戰)해 보라. 신문에 애정이 생기는 순간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는 시간을 경험할 것이다. 무거운 짐처럼 보였던 달팽이의 껍데기에는 중요한 장기가 들어 있다. 일견 딱딱해 보이는 신문 역시 정신의 자양분을 담고 있다. 신문을 더듬거렸던 달팽이는 비로소 값진 것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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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2012년 신문논술대회 수상작 모음집>중 대학/일반부 은상 수상작 김유미 님의 ‘달팽이, 신문과 마주하다’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