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7. 10:29ㆍ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최근 책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다름 아닌 ‘소돔의 120일’이란 책 때문인데요. ‘사디즘’이란 용어를 낳은 프랑스 작가 마르키 드 사드의 ‘소돔의 120일’이 우리나라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의해 즉시 수거, 폐기 처분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19세 미만 금지’ 처분을 넘어 성인을 포함해 모든 독자가 조차 읽을 수 없도록 즉시 수거, 폐기 처분 결정을 내린 것은 이례적입니다. 더군다나 ‘소돔의 120일’은 1785년에 처음 발표가 된, 나온 지 200년도 넘은 책인데다, 옥스퍼드 대학이 선정한 인문사상 추천 100선에 드는 작품입니다. 이런 조치는 프랑스 통신사 AFP를 타고 전세계로 알려졌습니다.
▲사드가 감옥 안에서 집필한 '소돔 120일' 책 표지(위 좌),
이탈리아 파졸리니 감독이 연출한 영화 '살로 소돔 120일'포스터(위 우)[출처-서울신문]
(전략)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자유를 노래하는 자들은 사드를 잊지 않았다. 보들레르는 자연 상태의 인간과 사드의 악을 연결시키면서 ‘악의 꽃’을 썼고,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자신을 ‘사드 유령에게 사로잡힌 지성’이라고 표현했다. 또 초현실주의자 폴 엘뤼아르는 “사드는 문명인에게 원시적 본능의 힘을 되돌려주고, 고착으로부터 사랑의 상상력을 해방시켰다.”고 말했다. 사드는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인간성’의 한계이자, 자유의 심연을 본 자다.
<‘소돔 120일’ 사드 - ‘변태 성욕자’ 낙인 속 인간성의 한계를 보다> 서울신문 2011.04.11
이처럼 국가나 종교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 도서의 역사는 깊고도 깊습니다. 오늘은 책을 사랑하는 다독다독과 함께 그 금단의 서적들을 함께 만나 보실까요?
서양 철학과 과학의 보고, 교황청 금서 목록
가장 유명한 금서 목록에는 중세부터 교황청이 지정한 금서목록이 있습니다. 교황청의 금서 지정이 중세에만 이루어진 것으로 아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1559년 교황청이 금서목록을 발표한 이래로 금서 지정은 계속 있어 왔습니다. 18세기에는 카사노바의 ‘회상록’, 마담 드 스탈의 ‘코린느’ 등이 대표적이고, 19세기에는 ‘채털리부인의 사랑’, ‘보바리 부인’, ‘율리시스’ 등도 교황청 금서 목록에 포함되었다고 하네요.
(전략)간행물윤리위원회가 최근 19세기 프랑스 작가 마르키 드 사드(1740~1814)의 소설 ‘소돔의 120일’ 번역본을 음란하다는 이유로 배포 중지와 즉시 수거 결정을 내렸다. 근친상간, 수간(獸姦), 시간(屍姦) 등 음란성과 선정성이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 위원회의 판단이다. 출판사 측은 “명작 반열에 드는 작품에 대한 판금을 이해할 수 없다”며 소송을 불사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후략)
<소돔의 120일> 한국경제 2012.09.19
[출처-yes24]
사실 교황청 금서 목록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일 겁니다. 그 외에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단테의 ‘신곡’,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 지금은 서양 과학과 철학의 경전으로 떠받들어지는 수많은 책들이 출간 당시에는 금서이자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불온 도서였습니다.
(전략)“서양철학을 알려면 교황청의 금서목록을 읽어라”라는 말이 있다. 금서는 외형상 핍박받고 수난당하는 모습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바꾼 역사의 승리자가 됐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단테의 ‘신곡’,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 당대의 금서들은 훗날 중세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 이성의 근대를 열었다.(후략)
<禁書> 조선일보 2004.05.27
교황청의 금서 목록을 보면 금서 목록인지 베스트셀러 목록인지 조금 헷갈립니다. 실제로 “서양철학을 알려면 교황청의 금서목록을 읽어라”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결국 금서로 핍박 받던 책들은 훗날 자신들을 핍박했던 중세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의 이성을 근대로 이끌었으니까요.
금서에서 베스트셀러로,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전의 나라는 대개 비슷하지만 우리나라의 사정도 교황청 금서 목록과 그다지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보통 권력에 도전하거나 정당한 권리를 찾자는 내용의 책들이 금서나 불온도서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았죠. 조선시대에는 왕권에 도전하는 역성혁명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정감록’이 대표적인 금서로 지정되었습니다.
(전략)그러니까 정감록은 다소 엉성하고 조잡스럽고 유치해 보이기는 하지만, 평민들이 권력자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 나름대로 꿈꿔 왔던, 그리고 가장 매혹시켰던 대항 이데올로기가 분명하다는 것이다.(후략)
<조선 후기 최대 금서이자 대표적 예언서 ‘정감록’> 서울신문 2012.08.11
일제강점기를 거쳐 조선 대신 대한민국이 들어선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54년 정비석의 ‘자유부인’, ‘반노’가 외설 논쟁에 휘말려 법정에 섰습니다. 1992년에는 그 유명한 ‘즐거운 사라’로 인해 마광수 교수가 구속되었고요.
[출처-yes24]
1980년대 군사독재가 삼엄할 때는 책을 소지한 것이 곧 죄가 되기도 했습니다. 존 로크의 ‘시민정부론’은 내란음모의 이론적 근거라는 이유로, 막스 베버의 ‘사회과학방법론’은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이유로,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온성이 넘친다는 이유로 그 책의 소지자와 독자들을 잡아다 고문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소돔의 120일'의 즉시 수거, 폐기 처분 결정 이전에 국방부에서 불온서적 리스트를 지정한 적도 있었죠. 2008년 국방부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23권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독자들의 기준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 논란이 되었지요. ‘나쁜 사마리아인들’, ‘대한민국사’, ‘지상에 숟가락 하나’ 등 이미 베스트셀러로 많은 국민들이 읽은 책을 ‘북한 찬양’, ‘반정부 반미’, ‘반자본주의’ 등을 이유로 불온서적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은 그 책들에 대한 관심을 폭발시켰습니다. 국방부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책들은 오히려 그 이후 판매량이 급증했고,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는 최고 10배까지 판매량이 늘어난 책도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인 노엄 촘스키는 이메일을 통해 “불온서적 판매량 증가는 한국인들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국방부가 자유를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려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노엄 촘스키의 책 2권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과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도 국방부 불온서적 리스트에 등재되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금서
지금 보면 어이없지만 출간 당시에는 논란이 되었던 책들 얘기를 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 판입니다. 심지어 로맨스의 대명사인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출간 당시에는 음란성 논란이 있었다고 해요.
[출처-yes24]
2004년 서울국제도서전이 10주년 기념으로 ‘금서 특별전’을 기획해 동서양 금서의 역사를 보여주었던 게 벌써 10여 년 전이네요. 이번 ‘소돔의 120일’로 어떤 분은 더 호기심이 동해서 책을 찾아보실 수도 있고 어떤 분은 판매 금지 조치가 과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음란소설이기도 했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그저 통속소설의 하나일 뿐이기도 했던 것처럼 시대와 상황에 따라 ‘금서’는 참 다양하네요.
©다독다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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